<그대에게>가 만든 감동의 원리
눈물 콧물 쏙 빼주는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시리즈는 무한궤도의 <그대에게>와 함께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1988년의 대학가요제는 응답하라에서도 보여준 것처럼, 전주에서부터 가슴 울리는 '그대에게'가 장식했다. 그리고 이 노래는, 그 해를 넘어 젊음과 열정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떠난 뒤 세상에 나온 책 『마왕, 신해철』에는 이런 <그대에게> 탄생 비화가 담겨있다.
당시 아버지의 검열을 피해서 기타를 뚱땅거려야 했던 나는 '심야 작곡 세트'를 갖고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기타 줄 사이에 스펀지를 끼워 넣은 기타와 문방구에서 파는 멜로디언이었다. 그걸 갖고 이불을 뒤집어쓴 후, 이불속에서 헉헉 숨을 몰아쉬며 곡을 쓰는 거다. 잠시 작업하다 보면 이불 안에 습기가 차고, 머리가 어지러워 네 마디 이상 연속으로 작업할 수가 없다. 그래도 아부지한테 안 걸리고 이것저것 소리를 내볼 수 있는 것만으로 대만족이었는데, 우리가 상을 탄 후 '무한궤도는 심지어 자동 작곡 장치도 있으며 <그대에게>는 코치들이 써줬다더라'는 얘기까지 들었으니... 나... 울까 웃을까.
(중략)
머리를 여기까지 굴린 후 인트로부터 후주까지 십 분쯤 걸려서 이불속에서 헉헉대며 곡을 썼다. 이리하여 1988년부터 현재까지 아직도 공연에서 우려먹고 있는 <그대에게>가 탄생했다. 사람들이 공연장에서 이 노래의 인트로가 나오는 순간 까무러치며 열광하면 모습을 보면, 난 아직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어쨌든, 졸라 좋아해주니 고맙긴 고맙다....
-신해철, 『마왕, 신해철』중에서
그의 예술적 10분은 그의 음악 인생과 그 해의 대학가요제와 지금의 응답하라, 그리고 그 시절 청춘들의 추억까지 만든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오랜 감동과 추억을 남겨줬으니 실로 가치 있는 10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마왕, 신해철』에 나온 그의 대학가요제 참가 전략을 보면, 그 10분 만큼이나 치밀하고 분석적인 마케팅과 처세를 배울 수 있다. 장난스러운 서술일지 몰라도 훌륭한 자기계발서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대학가요제나 강변가요제는 방송국 자체 축제의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프로듀서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던 밴드는 입상권의 노래(당시는 무조건 발라드)보다는 행사 구색용의 쿵짝쿵짝을 해줘야 된다.
->시스템을 분석하라!
2. 심사위원은 TV를 보면서 채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관객과 같이 있다. 그러므로 관객들의 반응을 잡아내는 것이 결과적으로 심사위원들에게 어필하는 지름길이며, 가장 정당한 방법이다.
->타깃을 집중 공략하라!
3. 기성곡이 아니라 신곡을, 다시 말해서 듣도 보도 못한 곡을 현장 관객, 심사위원, TV 시청자가 평생 처음으로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번 들어보니 좋은 곡' 따위는 먹힐 이유가 없다. '한방에' 보내야 하는 것이다.
->목표를 설정하라!
4. 어떤 노래든 일절쯤 들어보면 답이 나온다. 이 절은 어차피 일절의 반복이다. 그렇다 해도 '예의상 일절 이 절의 반복 구조는 있어야 된다. 그렇다면? 인트로와 아웃트로를 '나 들어왔어요, 저 끝났어요'라는 식으로 쓰는 게 아니라, 곡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독립 곡으로 간주하고 화려하게 벌이는 거다. 특히, 일회성 행사에서 눈 지그시 감고 두 시간 동안 인내심 있게 아마추어들의 장기자랑을 들어줄 사람은 거의 없다. 시작하는 순간 튀어야 하는 거다.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라!
5. 코드와 리듬은 누구나 이해할 수 이는 쉬운 패턴으로. 단지 국내 밴드 족보나 가요 족보에 전혀 없는 팝/록밴드풍으로 어레인지먼트를 복잡하게 벌인다.
->단순화하되 차별화하라!
6. 이상의 아이디어를 수줍은 아마추어처럼 연주하면서 동정표를 띠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고, 무엇보다 우리 체질에 맞지 않는다. 노련한 표정으로 노래가 삑사리가 나도 눈에 힘을 주며, 박자가 나가도 태연해야 한다. ('태연'보다 '의연'이 어울리겠다).
->내 일은 프로처럼!
7.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잔대가리 수준을 넘어 거의 야비 수준에 이르는데, 하는 수 없다. 이게 리더의 역할이다. 대학가요제에서 초창기 구도는 대상 - 그룹, 금상- 듀엣에서 대상- 듀엣 혹은 솔로, 금상 - 밴드의 구도였다가, 중기 이후는 대상/금상 - 아무나, 동상 - 참가 밴드 중 제일 난 놈이라는 구도로 정착되었다. 고로, 일단 라이벌 밴드들을 모두 격파한 후 최소 금상을 탈환해온다. (회의할 때 최소 금상이라고 얘기했다가 애들이 무지 구박했다. 꿈 깨고 동상이라고 건지자고. 대상 소리 꺼낸 놈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꿈을 가져라!
30년이 다 되어가도록. 이 노래 전주만으로도 이따금 눈물이 나는 건 이 노래와 함께한 지난 추억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그 시절을 불러오는 반가움 때문인지 지금은 없는 그의 목소리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런 감동을 만들어낸 마왕 신해철, 그는 이런 종류의 감동을 그땐 아마 상상조차 못했을 거다.
알고 보면 감동을 주는 일도 치밀한 전략에 기반한 것이다. 이제 와서 누리는 감동이 애초에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종류라 할지라도 말이다. 열정적인 전략이 없었다면 모두 없었을 일일 테니까. 감동의 원리는 감동을 예측하는 데 있지 않다. 감동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내가 나를 먼저 감동시키는 일. 그 작은 파동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퍼질지는, 시간이 흐르면 알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