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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스키 Jul 29. 2018

어쩌면 우리는, 서로가 없다면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한 삶 vs 서로를 인정하는 삶

나 좀 보아 달라는 외침


내가 써온 인터넷 일기장은 유행따라 달라졌다. 내 친구들도 그랬고, 친구들의 친구들도 그랬다. 여기에서 저기로 둥지를 참 많이도 옮겨 다녔다. 미니홈피, 블로그, 마이스페이스, 미투데이, 카카오스토리,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등. 기록만이 목적이라면 이렇게까지 공간을 이동시킬 필요는 없을 텐데. 


누구나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고, 인정을 갈구한다. SNS에는 오늘도 #제발나를봐주세요. #나를인정해주세요 라고 태그 달지 않았지만 나를 좀 보아달라고 수없이 외치고 있다. 인정받고 싶은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데, 인정해주는 사람들은 그 수를 따라가지 못한다. 오히려 시샘과 질투의 시선이 범람한다.


푸코는 평생 헤겔 변증법에 대항해 싸운 사람인데, 호네트는 푸코에게서 ‘투쟁 모델’을 찾아냈다. 동시에 호네트는 하버마스에게서 ‘의사소통 모델’을 이어받았다. 그 두 모델을 결합해 도출한 것은 ‘인정 투쟁’이다. 호네트에게 ‘인정’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자 개인들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관계, 곧 긍정적 자기의식을 찾아낼 수 있는 심리적 조건이기도 하다.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은 특히 사회적으로 ‘모욕’이나 ‘무시’를 받을 경우 분노라는 심리적 반작용을 일으키고 이 분노는 사회적 투쟁에 나서는 심리적 동기가 된다. 인정 욕망을 둘러싼 투쟁은 상호 인정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모욕이나 무시가 불의한 것이라면, 인정투쟁은 도덕적인 일이 된다.

-고명섭 기자, 2007년 5월 25일 한겨레, 「호네트의 대표 이론 - "인정투쟁은 긍정적 삶의 조건"」


'인정투쟁'은 철학용어이지만 이만큼 SNS 공간을 적절하게 표현한 말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인정받기 위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 전투의 잔해에서 열등감, 자괴감, 불안감이 피어난다.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아들러는 공동체 감각이 있으면 인정욕구가 사라지고 자유롭게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공동체 감각'이다. 아들러 심리학을 다룬 책『미움받을 용기』에서는 공동체 감각을 가지고, '지금, 여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며 춤을 추듯 살아가라고 말한다. 그렇게 더없이 소중한 '지금, 여기'를 산다면,  허무한 인정 욕구의 실현을 위해서 낭비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철학자: 전에 내가 인정욕구에 관해 설명했었지. 내가 "인정받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자 자네는 "인정 욕구는 보편적인 욕구다"라고 반박했지. 
청년: 네.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금도 완전히 납득한 것은 아닙니다. 
철학자: 하지만 이제 인간이 인정받기를 원하는 이유가 명확해졌네. 인간은 자신을 좋아하고 싶다, 자신이 가치 있음을 느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공헌감을 원한다. 그리고 공헌감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원하는 거지. 
청년: 인정욕구가 공헌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요?
철학자: 틀렸나? 
청년: 아니아니, 지금까지 하신 말씀과 모순이 되잖아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공헌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면서요? 선생님은 "행복이란 공헌감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다면 인정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야말로 행복으로 직결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하하, 선생님은 이제 와서 인정욕구의 필요성을 인정하시는군요!
철학자: 자네는 중요한 문제를 잊고 있어. 공헌감을 얻기 위한 수단이 '남들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이라면 결국 남이 의도한 대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어. 인정욕구를 통해 얻은 공헌감에는 자유가 없지. 우리는 자유를 선택하면서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네. 
청년: 행복은 자유를 전제로 한다는 뜻인가요?
철학자: 그렇지. 제도로서의 자유는 국가와 시대, 문화에 따라 달라지지. 하지만 인간관계에서의 자유란 보편적인 것이라네. 
청년: 어쨌든 선생님은 인정욕구를 수긍하지 않는다는 거죠?
철학자: 만약 진정으로 공헌감을 갖는다면 뭐 하러 남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겠나. 일부러 인정받지 않아도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실감할 수 있는데 말이야. 즉 인정욕구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직도 공동체 감각을 갖지 못하고, 자기수용과 타자신뢰, 타자공헌을 하지 못한 거라네.  
청년: 공동체 감각만 있으면 인정욕구가 사라진다는 말씀입니까?
철학자: 사라지네. 타인의 인정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미움받을 용기』中


Hi Crazy!


오래전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를 기준으로 서쪽의 사하라 사막을 죽음의 땅이라 여겨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들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죽음의 땅에서 열리는 죽음의 레이스를 즐기러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고대인의 입장에서는 미치지 않고서야 못할 짓을 하러 모인 셈이다. 그래서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이렇게 아침인사를 나눴다.
"헬로, 크레이지!"
"하이, 크레이지!"

오지레이서 유지성, 『하이 크레이지』中 


서로 미친 친구들아 안녕! 하고 인사하는, 『하이 크레이지』에서 소개하는 대회는 일주일간 사막 250km를 자급자족하며 달리는 극한 대회다. 내가 참가했던 사막 마라톤 대회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인사하지는 않았다. 다만 서로에 대한 막연한 호감이 서로에 대한 열렬한 응원으로 표현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강렬한 동질감을 느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미친 짓이니까. 실제로 함께 했던 한국인 참가자 중에는 커플 탄생도 이루어졌다. 


각자 달리면서도 하나의 목표를 가진 이들. 그 목표는 어떤 이념보다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훌륭한 장치가 된다. 그깟 공놀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로 묶여 열광할 수 있었는지, 우리는 안다. 월드컵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감정이 출렁였는가. 축구 규칙 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말이다. 월드컵 경기장이나 사막까지 갈 필요도 없다. 작은 산 등산로에서도, 마라톤 대회에서도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도 동질감이 느껴진다.


오로지 혼자서만 하는 일은 어쩌면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일지 모른다. 보여주기 위해 하는 일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자극을 주고, 어쩌면 서로를 더 멋있게 만들어주는 일이다. 아들러가 말한 공동체 감각을 가지고 있다면. 생산적인 방식으로 인정 욕구가 발산된다면 그건 인정투쟁이 아니라 인정 축제가 된다. 축제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지켜본다. 행복한 사람들의 표정 속에서 나의 행복도 짐작되기 때문이다. 내 행복을 인정받고 싶어서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가 필요하다. 서로가 없다면, 행복할 수 없다.

지금, 여기에서 진짜 산다면, 인정받으려 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말없이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나도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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