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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토리아 Jun 21. 2024

#8 소장절제수술 (1)

금식

 암병동으로 옮긴 날 또 혈변을 봤다. 하지만 다행히도 예전처럼 대량출혈은 없었다. 또다시 물조차 마시지 못하는 금식이 시작됐다.

 금식은 내가 가장 잘 견디는 일이었다. 처음 금식 땐 목이 너무 말라 거즈에 물을 적셔 입에 대고 있었고, 생수로 가글을 하며 물만이라도 마시게 해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괴로웠다. 두 번째 금식 땐 먹방을 보며 버텼다. 사람들이 먹방을 보는 이유가 납득이 됐다. 내가 못 먹는 걸 저렇게 맛있게 먹어주니 대리만족이 됐다. 하루에 4시간도 넘게 먹방을 보며 금식이 풀리면 가고 싶은 곳들을 저장해두기도 했다. 세 번째 금식 때부턴 식욕도, 물을 마시고 싶은 욕구도 사라졌다. 음식을 먹으면 컨디션이 안 좋아진단 걸 깨달은 후라 그랬을까? 금식이 풀렸을 때 오히려 무서웠고, 하루에 세 번 오는 병원밥시간이 끔찍했다. 안 들어가는 밥을 속상해하는 엄마를 위해 억지로 한 숟가락 먹는 것이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억지로 한 숟가락이라도 먹으면 다행이지 대부분 아예 못 먹겠다고 하는 날이 더 많았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서대문에 살 때 친구들과 마늘곱창에 맛있는 술을 마시는 걸 좋아했고, 안산 자락길에서 내려오면서 순댓국 한 그릇을 뚝딱하기도 했고, 자주 가던 영천시장 안에 있는 도가니탕을 즐겨 먹는 사람이었다. 배달도 자주 시켰다. 좋아하는 베이글집에서 크림치즈연어베이글과 연한 커피를 시켜 먹고, 마라탕, 타코 등을 시켜 먹으며 먹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을 떠오르면 속이 메슥거렸다. 먹방도 속이 메슥거려서 못 보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몸무게는 어느새 10킬로나 빠지고 말았다.

 금식을 하란 교수님의 말에 ‘다행이다’ 란 생각이 드는 나를 보며 ‘이런 게 거식증이라는 걸까? 란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을 시작으로 ‘교수님은 림프종은 원인이 없다고 하셨지만 내가 배달음식만 안 시켜 먹었다면 암에 안 걸렸을까?‘ 란 생각까지 들며 또다시 ’왜의 지옥‘에 빠져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하기를 반복했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내 머릿속엔 온통 ‘림프종 혈액암‘과 관련된 생각들만 가득했다. 이러면 컨디션이 더 나빠질 것 같아 명상도 해보고 TV도 켜봤지만 뭘 보든 내 생각의 끝은 ’ 내가 왜 아플까 ‘ 였다.

 다음 날, 교수님이 회진을 오셨다. 항암을 시작하면 림프종이 사라지면서 림프종이 있던 자리에서 출혈이 올 수 있다고 항암 전에 소장절제수술을 먼저 하자고 하셨다. 내 증상의 마지막 치료가 소장절제수술일 줄 알았는데, 이젠 첫 번째 치료가 소장절제수술이 되어버린 것이다. 선택지가 없으니 알겠다고 했지만 이렇게 큰 수술은 해본 적이 없어 무서웠다. 그렇게 나는 대장항문외과로 옮겨졌고, 이틀 후 수술이 잡혔다.

 

 수술 당일 날, 침대에 누운 채로 엄마와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아마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암병동으로 옮긴 후, 엄마와 나는 내가 울기 시작하면 상대방도 운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기에 서로의 앞에서 안 울기 대결이라도 하듯이 눈물을 참았고, 잠시 엄마가 전화를 받으러 갈 때나 밥을 먹으러 갈 때 참아왔던 울음을 토해냈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눈이 늘 빨개져있었다.

 그렇게 우는 나를 실은 침대는 수술대기실로 들어갔고, 이른 아침인데도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정말 많았다. 속상했다. 이 세상엔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내 옆의 환자에게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질문을 하셨다.

 “오늘 무슨 수술받으세요?”

 “갑상선 수술이요”

 그 대답을 듣고 이러면 안 되지만 나도 모르게 부러웠다.


 2년 전, 건강검진 덕에 우연히 갑상선 암을 발견했다. 주위에선 다들 “갑상선암은 암도 아니야” “착한 암 이래”라고 위로해 줬지만 그때도 꼬인 마음은 위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티는 내지 못했지만 세상에 착한 암이 어디 있냐며 받아치고 싶었다. 갑상선암 때는 암 그 자체보다 사람들의 말로 상처를 더 받았었고, 수술 직후엔 수술한 곳이 너무 아파서 “누가 착한 암 이래. 착한 암이 어떻게 이렇게 아파!” 하면서 엉엉 울었었고, 고통 없이 원래대로 팔을 쓸 때까지 몇 개월이 걸렸었다. 그 시간을 겪어온 내가 지금 옆사람을 부러워한다는 것이 오만하고 우스웠다. 내 또래였으면 ENFP 답게 옆 환자에게 파이팅! 이라고 외쳐주었을 텐데 과묵해보이시는 아저씨셔서 차마 용기 내지 못한 채 수술실로 들어갔다.

 차가운 수술실에 누워 마취를 기다리고 있으니 고독함이 밀려왔다. '이제부턴 옆에서 손 잡아주는 엄마도 없이 진짜 혼자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이때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이들이 떠올랐다. 수술시간에 맞춰 새벽미사를 가고, 묵주기도를 올리고, 화살기도를 해주는 고마운 사람들. 내가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간절히 기도를 해본 적이 있었을까? 없었던 것 같다. 나름 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내 착각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를 위한 기도를 떠올리며 ’난 혼자가 아니야 ‘라고 되뇌며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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