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스토리아 Jun 20. 2024

#7 전원, 그리고 새로운 진단명

두 번째 암

 주치의 선생님은 회진 때 캡슐내시경이 밤이 되어 끝나서 아직 결과를 확인 못하셨다고 했다. 그리고 추가 출혈이 있는지 알아보는 거니 너무 기대하지 말란 말도 덧붙이셨다. 기대를 하지 말라니... 그럼 나보고 어떻게 버티란 걸까.

 이때 부모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원래 내가 다니던 병원에서 전원 할 수 있단 연락을 받았다고! 2년 전 갑상선암 수술 후 다니던 병원이었다. 왠지 모르게 희망이 생겼다. 그곳에 가면 새로운 시선으로 이 망할 소장 출혈의 원인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희망과 가능성이었다.

 우선 전원을 하려면 혈압이 안정되어 일반병실로 내려가야 했다. 침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흘러가지 않는 시간을 억지로 보냈다. 눈 떠서 시간을 확인하면 5분씩만 지나가있고, 잠도 오지 않아 괴로운 그 시간을 ‘새로운 병원에 가면 방법이 있을 거야’라는 말로 채우면서 이틀을 보내고, 겨우 일반병실로 내려가 전원신청을 했다.

 사설 구급차를 타고 새로운 병원으로 가는 길, 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들이 보였다. 내가 종종 운전하던 길이었다. ‘나 이 도로 운전하고 다녔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급차는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익숙한 거리로 향했고, 그 거리에 있던 추억이 담긴 식당, 카페, 영화관을 지나가니 마음이 포근해져서 왠지 이 병원에선 잘될 거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전원을 하고선 이전 병원에서 한 검사를 반복해서 했다. 새로운 검사가 있었다면 PET-CT였다. 고열이 왜 나는지 몸속 어디에 염증이 있는지 손 끝, 발 끝까지 찍는 검사라고 했다. 어떤 주사를 맞고 잠시 대기 후 시티를 찍었다.  

 주말이 지나고 혈액내과에서 교수님이 오셨다. 펫시티상 높은 확률로 ‘림프종 혈액암’으로 보이고 림프종이 소장을 침범해 출혈이 난 걸로 보인다며 항암치료를 해야 한다고 하셨다. 이 모든 정보를 받아들일 새도 없이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결혼은요?”

“했어요”

“아이는요?”

“없어요”

“항암치료하면 아기 갖기 힘드실 거예요”

 교수님은 암병동에서 보자면서 나가셨고 엄마와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사실 내 증상이 암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전 병원에서 원인을 찾아내느라 정말 수많은 검사를 했기에 암이면 이미 발견됐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소장출혈과 고열 외엔 피검사, 염증수치, CT 등을 비롯한 모든 검사의 수치가 정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림프종 혈액암이라니..? 2년 전 갑상선암이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암인 줄 알았는데 내가 또 암이라고? 내가 왜?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나보다 나쁜 연쇄살인마들도 이런 거 안 걸리고 감옥에서 살고 있는데 왜 내가 이딴 암에 걸려야 해? 일 좀 많이 한 거? 그게 잘못이야?

 억울했다. 화가 났다. 뭐라도 다 던져서 부수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좋은 일 뒤엔 나쁜 일이 찾아온다더니...


2024년의 시작이 참 좋았다. 내가 사랑하는 작품이 뮤지컬 어워즈 작품상, 작곡상을 탔고 극작상도 수상했다. 4월엔 결혼식도 올렸다. 아이 욕심이 있던 오빠와 나는 아이 두 명을 계획하며 허니문 베이비를 시도해 보자고 말했다. 그렇게 내 인생은 흘러갈 줄 알았다. 데드라인 때문에 스트레스받다가도 또 공연이 좋으면 헤벌쭉하며 다음 작품을 쓰고, 육아 때문에 지쳐 서로를 원망하다가도 육퇴 후 치맥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5월, 갑자기 찾아온 내 현실은 림프종 혈액암, 불임 혹은 난임, 항암치료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하느님이 나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을까. 이럴 거면 좋은 일도 주시지 말지. 상 안타도 글 쓰는 거 즐거웠고, 결혼 안 해도 글자와 둘이서 행복했는데... 주위에선 위로를 해주기 시작했지만 꼬인 마음 때문에 위로는 마음에 닿지 못했다.

“그동안 너 너무 바빴으니까 좀 쉬라고 하시나 보다”

쉬는 방법은 다양한데 꼭 이 방법을 택하셔야 했을까. 굳이?

“이 고통 뒤에 더 큰 기쁨을 주실 거야 “

더 큰 기쁨 따윈 필요 없었다. 그냥 적당한 불행과 행복, 그거면 충분했다.

“더 깊은 글 쓰게 해 주실 거야 “

깊은 글을 쓰기 위해서 이 고통을 겪고 앞으로의 고통도 겪어야 한다면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글 쓰는 걸 가장 좋아하는 나지만... 나는 글보다 나의 삶을 더 좋아했다.

 원목실에서 신부님이 오셨다. 나는 아이처럼 울며

 “나름 착하게 산 거 같은데 왜 제가 암에 걸렸을까요”라고 물었고 신부님은 대답해 주셨다.

 “자매님이 잘못해서 암에 걸린 게 아닙니다. 암은 형벌이 아닙니다.”

 형벌이 아니라지만 형벌처럼 느껴졌다.

 지금 나에겐 형벌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6 세 번째 중환자실에서의 6일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