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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스토리아 Jun 16. 2024

#6 세 번째 중환자실에서의 6일 (2)

창문 밖의 나무

 다시 돌아온 중환자실은 예전과는 느낌이 달랐다. 희망이 없으니 마치 처음처럼 두렵고 고독했다. 밤새 소리치던 환자들의 섬망증세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욕설과 비명소리는 몇 시간째 끊이지 않았다. 어젯밤에는 ‘괜찮아, 하루만 지나면 이곳을 나갈 수 있어’라고 되뇌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고 멍했다.

 그때 내 앞의 환자분의 침대에 커튼이 쳐졌다. 목에 주삿바늘을 꽂으시나 보다 생각했는데 곧이어 병문안을 온 가족들이 들어와 하염없이 우셨다. 그러곤 마치 관처럼 생긴 무언가가 들어오더니 내 앞의 환자분을 싣고 나갔다. 두 번째 응급실에 있을 때도 봤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동요하지 않고 각자 자리에서 일을 해나갔다. 그렇다. 내가 있는 이곳은 그런 곳이었다. 죽음이 가깝게 있는 곳. 그것이 익숙한 곳.

 그때 갑자기 또다시 혈변이 시작됐다. 대량출혈이 끝나고선 이제 자연스레 멎을 일만 남았는데, 다시 이렇게 대량출혈이 일어나는 일은 여태 없었다. 또다시 혈압은 급격하게 떨어져 60 밑으로 내려갔고, 목으로 수혈이 빠른 속도로 떨어졌지만 혈압이 오르지 않아 혈압승강제를 사용해 억지로 혈압을 끌어올렸다. 그렇게 혈압을 끌어올리니 심장이 너무 아파 숨을 쉬기가 힘들어 과호흡이 왔다. 거칠게 호흡하는 나를 간호사들이 앉혔다. 그러면 호흡하기가 더 쉬울 거라고. 하지만 앉으니 심한 어지러움과 구토 증세가 나와 다시 눕혔고, 그러니 또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누워도 고통스럽고 앉아도 고통스럽고 혈변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나와 간호사 선생님들이 기저귀를 가는 것을 포기할 정도였다. 마치 내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오듯 다리와 침대시트는 온통 빨갛게 물들고 축축했다. 그 상태는 금방 나아지지 않고 몇 시간을 이어졌고, 주치의 선생님은 가족들을 불러야 하나 고민했지만 결국 부르지 않고 혈압을 더 올렸고, 그렇게 해서 숨을 쉬기가 더 괴로워졌다. 끝이 나지 않는 고통 속에서 나는 해서는 안 되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제발 저 좀 데려가주세요. 제발 이 고통을 끝내주세요.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이거 또 반복하느니 그냥 저 좀 죽게 해 주세요’ 그 기도를 계속 반복하다 지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눈을 뜨니 여전히 중환자실이었다. 내 기도보다 우리 가족들과 날 사랑해 주는 이들의 기도가 더 셌나 보다. 그 기도배틀에서 졌고, 정말 나쁘게도 나는 또다시 이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슬펐다. 한 달에 한번 출혈이 나서 응급실-중환자실-일반병실, 이렇게 2-3주를 입원하고 퇴원해서 일주일 있으면 또 출혈이 나서 입원을 반복하는 삶을 사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일주일 동안 체력이 좋아 여행도 다니고 강아지 산책도 시키고 신혼집도 가고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힘없고 밥도 잘 못 먹어 거의 누워만 있는데...

 혼자서 남미여행을 갈 정도로 배낭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다신 여행도 못 갈 거고, 정상적인 결혼생활은 불가능할 거고, 뮤지컬은 다시 쓸 수 있을까? 나 작가로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때 간호사 선생님이 부모님이 면회 오셨다고 했다. 나는 힘없이 부모님을 맞이했다. 부모님은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량출혈을 이틀 연속 한 내 모습이 초췌해서기도 했겠지만 희망이 너무 없어 보인다며 울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글자를 생각해서라도 네가 힘을 내야 해. 희망의 끈을 놓으면 안 돼”

 “기도해. 다 들어주실 거야.”

 하지만 난 그 어떤 말에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바라는 기도와 내가 바라는 기도는 다를 테니까. 멍한 눈으로 그저 눈물만 흘리는 나를 뒤로 하고 면회시간이 끝난 부모님은 중환자실을 나가셨다.

 그 후 간호사 선생님을 통해서 사진을 받았다. 가족사진과 글자사진이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내 침대에 그 사진들을 붙여주며 이 귀여운 강아지 이름이 뭐냐며 말을 거셨다.

 “글자요.”

 “이름이 특이하네요. 무슨 뜻이 있으세요? “

 “제가 사실은 뮤지컬 작가거든요.” 까지만 말했는데 눈물이 났다. 불과 몇 달 전의 내가 너무 낯설고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제 첫 강아지라 제 첫 뮤지컬 이름에서 가져왔어요. “

 “뮤지컬 작가요? 우와! 너무 신기해요. 저 처음 봐요! 그럼 한솔님 좀 쉬세요. 저 진짜 어제 잘못되시는 알고 너무 무서웠어요. 잘 이겨내셔서 다행이에요. “

 그렇게 간호사 선생님은 내 침대를 떠났다.

 ’한솔님‘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내 이름이었다. 병원에 오고 나서 내 이름은 언제나 ‘환자분’ 아님 ‘7번 베드’ ‘14번 베드’ ‘506호 환자’ ‘GI bleeding'이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잠시나마 원래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준다는 것이 이렇게 감사한 일인지 알지 못했다.

 링거를 갈아주러 그 간호사 선생님이 다시 오셨고, 핸드폰도 주셨다. 의식 있는 환자들이 중환자실에서 시간 보내는 거 괴로운 일이라고 허락받았다면서. 나는 시간 되시면 곧 개막하는 뮤지컬을 보여드리고 싶다 했다. 간호사 선생님은 안 그래도 내 이름을 검색해 보고선 그 뮤지컬 보러 가려고 했다고 티켓 자신이 사서 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처음으로 제 이름 불러주셔서 감사해서 꼭 보여드리고 싶다고 했고 친구에게 부탁해 간호사 선생님 티켓을 사드렸다. 간호사 선생님은 공연을 못 보러 가는 나 대신 재밌게 보겠다고 감사하다고 하셨다.

 

 다음 날, 주치의 선생님이 오셔서 캡슐내시경을 다시 할 거라 하셨다. 저번에는 내가 누워만 있어서 위에서 멈췄다며 이번에는 소장 끝까지 가길 바라보자고 하셨다. 손가락 한마디 사이즈의 캡슐을 꿀꺽 삼키고 침대를 올려 앉아 다리를 움직였다. 걷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움직여서 이번에는 반드시 소장 끝까지 가게 해야만 했다. 그렇게 출혈부위와 원인을 찾아야지만 지혈을 하던 아니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소장절제수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창문밖의 나무 보였다. 그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나는 12시간 동안 앉아 다리를 움직였다. 희망을 다시 갖기 위해. 나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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