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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영 May 13. 2020

질문하는 아이, 생각하는 아이

아이가 질문한다면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사진을 보고 나서 큰애는 죽음에 대해 한동안 이야기했습니다. 친정아버지는 제가 큰애를 임신했을 때 돌아가셨습니다. 외할아버지를 뵌 적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나중에 천국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이후 아이는 죽음에 대해 반복해서 물어봤습니다.      

“엄마,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지. 왜 돌아가셨어?”     

외할아버지가 노환으로 연세가 많아서, 또 아프셔서 돌아가셨다고 답하니 또 다른 질문이 돌아옵니다.      

“나이가 많으면 왜 죽는데?”     

기계를 많이 쓰면 부품이 낡고 고장이 나는 것처럼, 우리 사람의 몸도 늙으면 아픈 데도 생기고 약해지기도 한다고.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 수 없다고 답해주었습니다. 아이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엄마 슬퍼? 엄마 외할아버지 보고 싶어?”

“그럼, 만나고 싶지.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많이 그립지.”

“난 엄마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      

아이는 울먹였습니다. 아이는 엄마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평아, 엄마가 평이랑 오래 같이 있으면 좋겠구나, 그치? 엄마도 그래. 엄마도 우리 평이랑 명이랑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어. 그런데 평아, 사람은 누구나 죽는단다. 그래서 함께 있는 시간 동안 더 많이 사랑하는 거야. 그런데 우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지? 엄마도 외할아버지와 천국에서 만날 생각을 하면 보고 싶어도 참을 수 있어.”     


이 일련의 대화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큰애는 죽음에 대해 반복해서 질문했습니다. 어느 때는 놀다가 뜬금없이 물었습니다. 사람은 왜 죽냐고. 외할머니도 죽는 거냐고. 엄마도 죽느냐고. 엄마랑 외할머니가 안 죽었으면 좋겠다고. 신나게 장난감 이야기를 하다가도 물었습니다. 천국에서 엄마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예수님의 부활에 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이야기. 천국의 소망을 이야기하니 당연히 요한계시록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죽은 사람들도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성경 구절도 이야기 나눴습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어른인 제게도 그리 편치 않은 주제입니다. 게다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들과의 이별을 전제로 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피할 수 없지만 가능하면 미루고 싶은 어려운 숙제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큰애는 바로 그 죽음에 대해 반복적으로 질문했고, 저는 싫어하는 내색을 들키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죽음을 주제로 하는 그림동화를 함께 읽기도 했습니다.     

      

계절이 바뀔 즈음 등원길이었습니다. 여느 날처럼 차를 타고 가다 이야기 끝이 외할아버지에게 닿았고, 큰애가 말했습니다. 

“엄마 천국 가면 할아버지 만나서 좋겠다.”     

언제나처럼, 죽음에 대한 주제는 일부러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럼. 우린 천국에서 만날 수 있으니까.”     

즐거운 영혼의 둘째가 끼어듭니다. 

“그럼 우리도 같이 할아버지 보는 거야?”     

큰애가 뭘 모른다는 듯이 둘째에게 그럽니다. 

“아니지, 우린 아직 천국에 없잖아.”     

그때 알았습니다. 어느덧 큰애의 사후 세계관이 나름 잡혀있다는 걸.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곁에 엄마가 갈 때는 아직 자기는 세상에 살아있을 테니 당장은 천국에서 외할아버지랑 엄마랑 같이 만날 수는 없다는 시간의 흐름을 잡고 있다는 걸요. 한창 천국에 대해 질문했던 큰아이. 등원길 마다 물어보았던 자신의 질문에 엄마가 답한 내용을 모아 나름 정리를 한 거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아이는 질문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이들의 질문은 웬만한 인내심의 어른들도 지쳐 떨어지게 합니다. 반복하기 때문이죠. 아이들은 질리지 않습니다. 무한반복 모드에 접어들 낌새가 느껴지면 어른들은 이미 눈치채고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가올 반복의 회수를 줄일 수 있을지 궁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질문의 반복은 참아야 합니다. 아이가 반복해서 질문한다는 건, 제 경험상으로는 두 가지 경우입니다. 아이들은 재미있는 경우에 반복합니다. 어른들도 그렇죠. 재미지면 좀처럼 싫증이 나지 않으니까요. 이때는 그냥 같이 즐기면 됩니다. 진짜 재미있을 수도 있고, 재미있어하는 아이 모습이 재미있어서 웃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반복하는 또 다른 경우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입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반복해서 질문하며 답을 찾습니다.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아이가 반복하는 주제에 대해 추가 정보를 주거나 아이가 생각할 수 있도록 질문을 제시하면서 대화하는 방법이 좋습니다. 아이는 개념을 세워가고 있으니까요.      

큰아이는 이제 죽음에 대해 예전처럼 자주 질문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할머니가 키우시던 새끼 고양이가 죽었습니다. 아주 어릴 때 데려와서 할머니가 우유 먹이시던 고양이, 아이들은 부들이라고 이름 지어 주었습니다. 밥을 먹을 정도로 컸던 고양이가 죽었을 때, 큰애는 슬퍼하면서 생명의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인정한다고 해서 안 슬픈 건 아닙니다. 아이들은 가끔 고양이 부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외할머니가 키우시는 닥스훈트 망고가 낳은 강아지에게 부들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건 아마도 그리워서였을 겁니다. 슬프지만 담담히 생명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들의 경험이 늘어난 만큼 또 한 뼘 성장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해되면 아이들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지적으로, 감정적으로 수용이 되면 호기심이 사그라드는 건 어른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질문한다면, 그건 아이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스스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 크게 한숨 들이마시세요. 반복질문에 대비태세를 갖추세요. 이제 아이들은 쏟아낼 겁니다. 원래 그렇잖아요. 우리 어른들도 뭘 모를 때는 질문도 두서없이 하잖습니까? 아이들도 그럴 겁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시고 들어주세요. 평가도, 무시도 하지 말고, 짜증은 더더군다나 내지 말고 담담히 들어주세요. 가능하다면, 인정하는 말로 북돋아 주세요. 

“그랬구나. 그게 궁금했구나.”

“궁금했을 수 있겠다.”     

호기심을 표현하는 아이의 태도를 인정하는 말로 양념을 치면서 답해주세요. 아이의 질문에 따라 즉각적인 대답이 가능할 수도 있고, 추가 정보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땐 질문으로 답하시면 됩니다. 

“그러게, 엄마도 잘 모르겠는데, 그 정보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 어떤 책을 찾아보면 알 수 있을까? 엄마랑 같이 찾아보면 어때?”     


자신의 질문이 인정받고 수용될 때, 아이의 사고는 확장됩니다. 반복해서 질문하며 개념을 확립하려고 몸부림하는 아이의 노력에 상대가 진지하게 답하며 응원의 눈길을 보낼 때, 아이의 생각하는 힘은 튼튼해집니다. 무한 반복처럼 느껴지는 아이들의 질문에 답해야 할 이유,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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