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이가 아닌 머리로 공부하려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공부를 많이 합니다. 객관적으로 검증된 시간 정보가 있습니다. 2018년 보건복지가족부가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 의뢰해 '아동·청소년의 생활패턴에 관한 국제비교연구'를 작성했습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국내 15~24세 청소년의 평일 학습시간은 학교수업, 사교육, 개인 공부시간을 합쳐 7시간 50분입니다. 다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청소년이 공부에 쓰는 시간은 5시간 전후라고 합니다. 2시간이나 더 긴 셈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긴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는 우리나라 학생들. 그런데 학업성취 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낮다고 합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일주일에 공부하는 시간을 보면 더 말이 안 됩니다. 우리 청소년이 일주일에 공부하는 시간은 49.43시간으로 33.92시간인 OECD 평균에 비해 15시간이나 깁니다. 우리 아이들이 특별히 머리가 나쁘지는 않을 테니 뭔가 대단히 비효율적인 공부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학교 방과 후 수업시간에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애들아, 공부가 뭐야?”
너무 뻔한 걸 물어보는 선생님의 질문에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공부 하.는. 거요.”
“학습지 풀기요.”
다시 묻습니다.
“그럼 문제집 다 풀면 공부를 다 한 걸까? 엄마가 공부했니? 라고 물어보실 땐, 뭘 알고 싶으신 거니?”
매일 듣는 엄마 잔소리를 들어 물어보니 아이들 표정이 반짝입니다. 아마 아이들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오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게…. 엄마는 정말 뭘 알고 싶으신 거지?’
저도 엄마들께 조심스럽게 묻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뭘 하면 공부를 한 걸까요?”
공부하는 분위기를 풍기며 교과서나 책을 읽는 것이 공부일까요? 아이들 말처럼 학습지나 문제집 몇 장을 풀면 공부가 되는 걸까요?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는 우리 아이들이 공부에 대해 명확하게 답하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우리 아이들의 ‘공부’가 분명하지 않다는 말일 겁니다.
넓게 보면 세상 모든 공부는 내가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세상 공부도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잘할 수 있습니다. 교육학 키워드에 메타인지(Metacognition) 개념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지활동에 대한 인지’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무엇을 모르고 무엇을 아는가를 아는 능력입니다.
한 방송사에서 전국모의고사 석차가 0.1% 안에 들어가는 학생들과 성적이 평범한 학생들을 비교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 전 두 집단의 성적 차이는 IQ, 집안환경, 공부하는 시간 등에 있을 거라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성적이 높은 학생과 평범한 학생들 사이에서 확연한 차이가 드러나는 부분은 다름 아닌 ‘메타인지’였습니다. 상위 0.1% 성적인 아이들의 메타인지가 훨씬 높았습니다.
공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질문하고 나서 아이들과 이야기 나눴습니다. 공부할 때 학교나 학원에서 선생님들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이유는 뭘까? 우리는 왜 책에 밑줄을 치며 읽고, 문제집을 풀까? 채점해서 많이 맞고 틀리는 걸 확인하는 게 왜 공부하는 걸까? 이 모든 행동의 목적은 뭘까?
공부는,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능력, 이게 공부하는 학습능력입니다. 이 메타인지 능력은 AI 시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는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많이 아는 능력으로 따지면 결코 이길 수 없는 경쟁상대인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야 하니까요. 슈퍼컴퓨터일 필요도 없습니다. Siri나 지니 정도만 있어도 생활하면서 필요한 대부분 질문에 간단하게 답해줍니다. 이 시대 필요한 인재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모르는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바른 경로를 찾아갈 수 있도록 질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AI가 제시하는 수많은 정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무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즉, AI와 겨룰 경쟁자가 아니라 해석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런 인재가 되려면 우리 아이들은 어떤 공부를 해야 할까요?
지금처럼 책을 한 권 더 읽고, 문제를 하나 더 풀고서 공부했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그건 공부하는 과정이니까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구분해내기 위해서 하는 단계일 뿐입니다. 진짜 공부는 내가 왜 이 문제를 푸는지 질문하는 것 아닐까요?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이유를 찾는 게 공부일 겁니다. 역사 시간에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연대기적으로 암기하는 건, ‘다음 중 같은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닌 것은?’이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함이 아닙니다. 일련의 역사적 사건에서 인간이 반응하는 양태를 배워 우리가 사는 현재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찾기 위해서입니다.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가정하며 미래의 혜안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공부합니다.
이유와 의미를 찾는 공부, 해결책과 자료를 탐구하는 공부는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시대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부를 하려면 질문해야 합니다. 왜/어떻게/그래서? 라는 물음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 머릿속에서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게, 문제 하나 푸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책상에 그냥 넋 놓고 앉아 있는 한 시간, 두 시간과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어쩌면 너무 공부를 많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부하는 시간이 길다보니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이지요. “엉덩이력”을 너무 믿어서 요즘 유행하는 만화 캐릭터인 엉덩이 탐정이 될 지경입니다. 하지만 던져진 문제집만 풀고 요약지만 암기하느라 머리조차 엉덩이가 돼서는 안 되겠죠.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왜 공부하는지, 어떻게 공부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엉덩이만 하는 공부가 아니라 머리가 하는 공부, 더 나아가 마음이 움직이는 공부를 해야 우리 아이들의 공부가 즐거워집니다. 학창시기가 행복한 건 물론이고, 반드시 묻고 답을 찾아야 하는 인생의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배웁니다.
이 땅의 아이들이 진짜 공부를 하면 좋겠습니다. 엉덩이로 버티는, 공부라는 이름의 극기훈련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사고의 에너지가 버거워 엉덩이까지도 들썩거려지는 진짜 공부. 그 참맛 보기를 두 손 모아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도 전, 계속 질문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