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타자기 앞에 선 신념

영화 <트럼보>를 읽다

by ASTR

1.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자동으로 후기를 어떻게 쓸지부터 떠올리기 시작했다. 몇가지 괜찮은 문구가 떠올랐다. 하지만 영화관 불이 꺼지고, 찬 밤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문구들은 손안의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렸다. 남은 건 영화가 남긴

진한 여운 뿐이었다.


2. 트럼보는 실존 인물이다. 할리우드 황금기의 시나리오 작가였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작품을 써내려간 천재 글쟁이였다. 천재의 글쓰기. 그게 궁금했다. 당최 천재라는 위인들이 어떻게 쓰는지. 그런데 영화에서, 그 트럼보라는 은막 위 인물에게 내가 발견한 건 희번떡거리는 영감으로 순식간에 각본을 탈고해내는 그런 천재성이 아니였다. 그의 재능은 오로지 '이것'을 지키기 위해 사용됐다.


3. 자신이 믿는 것을 믿는 것. 굴복하지 않는 것. 우리가 흔히 신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념이라. 이 얼마나 진부하며 먼지 펄펄 풍기는 옛책에서나 나올법한 단어인가. 형태도 없고 그래서 보이는 것도 없다.

누가 지키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그걸 지킨다고 해서 그 어떤 명예요,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 무지막지한 메카시즘 정국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선 제일 먼저 버려야 하는게 트럼보가 가진 믿음이었다.


4. "당신 뭘 믿고 이렇게 맞서는거지? 이제 현실에 타협할 때가 됐잖아. 무섭잖아. 불안하잖아. 이길 수 없단 것도 너무나 잘알아. 그런데 왜?"


영화 내내 이렇게 묻고 싶었다. 궁지에 몰리고 벼랑 끝에 섰을때 아무말 없이 낡은 타자기 앞에 앉은 그의 모습을 보며.


하지만 치열하게, 전혀 아름답지 않게, 모두가 떠나가고, 모두에게 모욕을 당할때 그는 의연했다. 자신의 재능을 무기로 신념을 지켜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5. 영화가 끝나고 자막 하나가 올라왔다. 트럼보의 실제 인터뷰가 나온다는 것이다. 자막이 한참 동안이나 올라갔지만, 일어나는 관객은 한명도 없었다.


6. 영화는 트럼보가 가진 신념을 훌륭하게 실체화해서 관객에게 던져준다. 그걸 받아본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그 옛사람 트럼보의 타자기 소리처럼 극장을 나서면서도 심장이 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