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떡밥이다
마블은 지금 영화사에서 흔치 않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영화가 영화를 공유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007시리즈, 인디아나존스 시리즈 등 같은 전통적으로 인기있는 프랜차이즈에서 더 진화된 형태로 - 프랜차이즈가 프랜차이즈의 모태가 되고 또 그 시리즈끼리 만나기도 하는 - 말그대로 영화 하나에 빠지기라도 하면 영원히 마블 영화를 관람해야 하는 개미지옥 구조를 가지고 있다. 관객을 끌어들이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오랫동안 영화 제작자의 고민은 어떻게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를 보게 만들고 입소문을 나게 만드느냐였다. 이건 영화의 퀄리티와 다른 문제다. 일단 영화관을 찾아 표를 끊고 팝콘을 사게 만들어야 영화가 재밌는지 아닌지 최소한 알게 될 것 아닌가. 명작이지만 관객이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막을 내린 영화가 수두룩하다.
지금까지 많은 영화들이 이 부분에 대해 고민했고, 그래서 간혹 천재적인 마케팅기법이 나오기도 했다. 거의 대부분의 헐리우드 제작사에서는 줄줄히 성공작들의 후속편을 찍기 바빴다. 개봉전 영화를 기대하도록 예고편도 쌈박하게 찍고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제작사는 제대로 된 포인트를 집어내는데 실패했다. 물론 제작사 투정만 받아줄 건 아니다. 관객들도 고역이다. 관객들은 정보의 비대칭으로 영화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다. 문제는 과연 이 영화를 내가 만원을 내고 봤을때 아깝지 않느냐는 확신이다. 짧은 예고편과 시놉시스, 배우들, 장르만 보고 판단하기엔 그 선택의 폭이 너무 좁다.
마블은 이 지점에서 확실히 승리했다. 이제 관객들은 마블이라면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짧은 예고편 만으로도 신뢰하고 영화관을 향한다. 관객은 새로 나온 마블의 영화를 따로 떨어진 시리즈로 보지 않고 거대한 세계관 속 일부로 인식한다.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마블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새로운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마블은 이걸 어떻게 성공시켰을까. 캐릭터의 힘? 아니다. 매력적인 캐릭터는 DC에도 있다. 자본의 힘? 아니다. 이제까지 헐리우드가 돈이 없어서 이런 영화를 안찍은 것이 아니다. 마블의 이런 성공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떡밥이다.
2008년 아이언맨 1편에서 처음으로 뿌린 세계관의 떡밥이 차곡차곡 모여 지금 2016년의 캡틴아메리카 : 시빌워까지 이르렀다.
이 떡밥을 매력적으로 만든데에는 그들의 탄탄한 장기플랜이 있었다. 그 방대한 모든 이야기를 통합해둔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다. 하나하나 천천히. 그들이 욕심을 부렸다면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기획이다. 이번에 개봉한 시빌워를 볼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다행히도 그들은 인내했고 영화 한편에 떡밥을 조금씩 첨가했다. 넘치지 않도록. 그 매력적인 떡밥에 유인돼 관객들은 홀리더니 어느새 마블 페이즈의 끝자락을 앞두고 있다.
처음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시작됐을때 나는 지금 이 거대한 계획의 일부만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그리고있던 그림은 아주 거대한 이야기였고, 그 전체 그림을 모두 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새삼 마블의 뚝심에 감탄하게 된다. 그들의 계획과 현실로 이뤄진 것들을 차례로 보고 있노라면 자신들이 성공할 것이라는 이들의 절대적인 확신 마저 느껴지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그렇지만 꾸준히. 마블은 이 떡밥의 법칙으로 성공했다. 다른 이유가 없다.
뭐, 내 인생 유니버스라고 해서 뭐 다를까. 내가 하는 일들이 어떤 한 지점을 향해 모든 떡밥을 던진다면 - 꾸준히 말이다 - 언젠가 그 떡밥들이 성공을 낚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캡틴 아메리카 : 시빌워의 성공을 보면서 더욱 절감한다. 지금 나는 어떤 떡밥을 던지고 있나, 작은 이익에 연연해 소탐대실하고 있지는 않은가, 꾸준히 큰 그림을 그리고 있나. 단기적인 성공에 급급해 이야기보따리를 먼저 풀어버린 DC의 실패를 보면서 또 나의 인생 유니버스도 겹쳐보이는 것이다. 나는 다를 것이 있는지.
단순히 히어로 무비 제작사라고 치부하기엔 마블은 너무 잘해왔다.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인생에 꼭 뿌려야 할 떡밥 같은 것들. 그런 의미에서 시빌워 한번 더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