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가 아니라 이곳에 있었어
새벽녁, 그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과 그 사이로 어스프름하게 보이는 거대한 성곽. 저 변방에서 날아온 낯선 이방인에게 캄보디아는,
한없이 오래된 시간들을 뚫고 인사한다.
안녕, 드디어 만났구나.
캄보디아의 아침은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싱그러움과 고대의 신비로 가득 차 있었다.
호텔 앞에서 우연히 잡은 툭툭 아저씨의 권유였다. 일정에 없던 앙코르와트 새벽행 툭툭을 탄 것은.
고대의 흔적을, 이미 스러져버린 문명의 기억을 새벽에 봐야 한다는 건 아마 그 밤과 낮의 모호한 경계가 내가 사는 일상과 앙코르와트 유적 사이 벌어져 있던 거리만큼이나 확연했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툭툭을 탔다.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매표소 앞에는 이미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1일권은 20불. 이 나라 물가에 비해선 엄청 비싼 금액이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표를 끊으면서 함께 사진 촬영을 해 표에 프린팅을 해주기도 한다.
아침해가 오르고, 유적의 민낯이 드러났을 때 하늘 위로 쌓아올린 돌덩이들 틈 사이에 섰다. 어떤 미지의 슈퍼스타라고나 할까. 몇 세기 전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그 장고의 시간만큼 과거 속 어느 시간에 매몰된 앙코르와트는 낯설게만 보였다.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 그 자체. 앙코르와트를 포함한 앙코르 유적은 현재 캄보디아를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국가 산업이나 다름 없다 - 생각해보면 몇세기 전 죽은 문명이 살아있는 현대 문명을 떠받들고 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한데 - 난 캄보디아의 여행 이틀째 되는 날에 어떤 것을 깨달았다.
이 나라의 가장 거대한 부분인 앙코르 유적을 뺀 나머지. 과거의 캄보디아가 아니라 지금, 바로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살아있는 캄보디아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 눈 앞의 위용에도 무심하다가 문득 새벽녁 느꼈던 그 신비로움이 달아나기 전에 다시 캄보디아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적어도 죽어있는 문명에서는 아니었다.
문명이 아니고 유적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발견하고 싶었다. 사람 속의 살아있는 캄보디아. 이 글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 : 캄보디아에 대한 기록이다.
앙코르와트의 아침은 마냥 평화롭다. 거친 밀림 속에 우뚝 솟아있는 문명의 흔적에 뚜벅뚜벅 들어가는 경험은 이곳에서만 할 수 있으리라.
앙코르와트를 한번 돌고 난 뒤 내려오는 계단에 한 어린 소녀가 앉아있었다. 그 아이 옆으로 난간 위에 떼로 원숭이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밀림 속 앙코르와트 계단과 작은 소녀, 그리고 그 옆을 노니는 원숭이라니.
이 만화 같은 풍경을 놓칠 수 없어 소녀를 몰래 찍었다. 거대한 유적 아래 무척 작았던 아이, 그 눈빛은 유적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어린 승려들도 눈에 띄었다. 이곳은 그들에게 중요한 성소이다. 걸음 하나하나가 수행처럼 보였다.
앙코르와트의 화려한 위용 이편에는 캄보디아의 아픈 기억도 있다. 씨엠립의 킬링필드 왓트마이 사원. 1975년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고 캄보디아도 크메르루주의 폴포트가 장악하면서 거의 200만명의 국민이 학살당한 사건. 이 나라는 각 지역에 작은 킬링필드(죽음의 뜰)을 만들어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그 참혹한 기억에서 이제는 새로운 세대의 표정으로 덧입혀지고 있다.
씨엠립에는 실크팜이라는 훌륭한 관광코스도 있다. 캄보디아 주민들이 직접 실크를 뽑아 가공품을 만드는 농장이다. 시내에서 좀 거리가 있는 이 곳에, 시간을 내서라도 들려야 하는 이유는 아주 훌륭한 한국어 가이드가 있기 때문이다. 책과 드라마로 한국어를 배웠다는 그녀는 아직 한국에 온 적이 없다. 감사의 말로, 다음에 한국에 오게 된다면 꼭 한국을 소개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날 점심은 록락이라고 하는 현지 음식이었다. 데리야끼 불고기 같은 맛. 점심을 시키고 한참을 기다리는데, 옆에서 분주하게 코코넛을 나르는 아이가 있다. 분명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아버지를 돕는 모양이었다. 그에게 가지고 있던 초콜릿을 하나 건넸다.
오후에는 호텔 옆 작은 초등학교에 들렸다. 가지고 있던 초콜릿을 아이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금방 초콜릿을 나누어주고 난 뒤, 가지고 있던 캄보디아 돈 리엘을 모두 털어 학교 뒤 매점에서 과자를 샀다. 하나씩 나누어주며 사진을 찍었다. 캄보디아의 진짜 얼굴들.
캄보디아에 톤레삽 호수를 빼놓을 수 없다. 씨엠립 시내에서 차로 40분 거리다. 바다처럼 보이는 거대한 호수. 이곳의 수상가옥은 또 다른 캄보디아의 얼굴이다. 운이 좋기로 그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 가이드를 만났다. 어부였던 부모를 어렸을 때 잃고 관광 안내 일을 일찍 시작한 그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호수 위에서 그는 가장 자유로워보였다. 그가 한 말들, 팔에 난 상처, 함께 나눈 맥주, 농담들, 모두 캄보디아 원래의 날 것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일정이 없었다. 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를 다시 찾았다. 아이들이 등교하는 걸 보고 싶었다. 엄마가 스쿠터로 아이를 데려다주는 모습,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는 모습들, 길거리 식당에서 아침을 먹는 아이, 친구들과 장난치는 모습, 거리를 청소하는 아이들, 그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캄보디아에 온 것을 몇번이고 절대 후회하지 않는 순간.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계속 떠오르는 건 거대한 문명의 기억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만난 보통의 캄보디아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평범한 삶들. 나의 카메라를 보고 한번 웃어줬던 그들의 얼굴이 여행에서 얻은 가장 값진 것이었다.
캄보디아의 얼굴들. 앙코르와트가 아니라 시장과 학교와 거리와 실크팜과 톤레삽 호수 위에 살아숨쉬는 그들을 보고 왔다. 캄보디아는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