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500일의 썸머> 이야기
간만에 예전 영화를 꺼내보고 싶었다.
“이거 내 인생작 손에 꼽는 영화야”
B와 언젠가 봤던 것 같은데, 처음 본다고 해서 더더욱 같이 보는 의미가 생겼다. 저녁 한상을 차리고, 우리집 시네마가 시작됐다. <500일의 썸머>.
“썸머 너무 나빴다.”
중반부 지나가자 B가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톰의 입장에서 너무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매력은 있지만, 그래서 불안하다. 확정되지 않은 감정. 정의되지 않은 관계. 연인에게 최악인 형태. 게다가 로맨티스트 톰에게는 추상적인 사랑이란 감정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이었고 썸머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썸머는 그렇게 톰을 괴롭게 하더니, 결국 헤어지게 됐고 목메는 연애는 싫다고 하더니, 곧 다른 사람을 운명이라며 바로 결혼으로 직행한다. 이 과정이 무척이나 이해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래 지나 다시 영화를 보니, 감상이 달라졌다. 나이가 들어서 그럴까. 썸머의 입장도 이해가 됐다. 썸머는 결국 톰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보자.
첫째로, 둘은 관계의 비대칭 함정에 빠졌다. 영화는 톰의 관점에서 진행된다. 그래서 썸머의 마음은 장면 장면 엿볼 수 있는 수준이지만, 톰의 마음을 기준으로 보자면 톰은 스스로를 확실히 “나는 썸머를 정말 사랑한다.”라고 믿고 있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톰은 사족을 단다. “어쩌면 썸머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더”
우리가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는 완전히 균형을 이룰 수가 없다. 천생연분 연인이라도 미세한 불균형이 있다. 시소처럼 서로 오르락내리락하며 만나는 것이지, 이 불균형 자체에 집중하다 보면 뭔가 공정하지 않다는 기분에 휩싸이게 된다.
“나만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이 생각은 뿌리를 깊게 내리고, 불만을 갖게 만든다. 이 관계를 이끌어가고 노력하는 건 오로지 나일뿐, 상대는 크게 애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 생각의 정체는 보잘것없다. 사실 “사랑하는 나”를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에 불과하다. 본인 사랑의 크기에 대해 과대포장하고 상대의 노력은 폄하한다. 내 사랑의 무게는 부풀려 받아들인다. 관계를 저울질하기 시작하면, 항상 자기가 무거운 편을 고르게 되어있다.
이 생각의 말로는 좋지 않다. 상대가 실재 얼마나 사랑을 쏟고 있는지 알 수 없도록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톰도 자신이 생각하는 애정의 크기, 방식에 썸머가 맞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 - 벽을 만들게 된다.
둘째로, 톰은 스스로를 알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나는 어떤 사람이야. 나는 어떤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추구해.”라고 스스로를 파악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타인을 통해서다. 나는 나를 어느 면은 과장되게, 어느 면은 이상적으로, 어느 면은 실제보다 부족하게 판단한다. 이 면들을 모두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건 타인의 눈뿐이며 그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다듬고 조금씩 더 알아간다.
톰은 어땠을까. 톰은 스스로를 로맨티스트, 운명론자로 여겼고 썸머는 그 반대의 지점에 있었다. 톰이 썸머와의 관계가 진전되지 않는다고 여기며 갈등이 고조된다.
사실 그 갈등의 기저를 잘 살펴보면 그 둘의 상반된 스타일과 별개로 톰의 자격지심이 크게 작용한 걸 볼 수 있다. 단순히 시비를 건 것을 참지 못하고 주먹이 날아간 것은 스스로 생각했을 때 본인이 썸머를 사랑할만한, 썸머의 사랑을 완전히 독차지할 만큼의 매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인이 가진 원래 꿈을 포기하고 일반 회사에서 인사말이나 적으며 일하는 게 자신에게 알맞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썸머의 생각은 달랐다. 톰은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되는 멋진 사람이었으며, 새로운 꿈을 좇을만한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썸머가 보는 톰과 톰이 스스로 생각하는 톰이 달랐던 것이다. 이 말은 곧 서로가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잘 풀리면 톰에게 썸머가 귀인으로 작용하겠지만 잘 풀리지 않으면 그저 서로 답답한 채로 관계가 끝나고 마는 것이다.
셋째, 가장 중요한 타이밍.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인 “사랑의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와 닿아있는 키워드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또 관계를 이어가는 그 모든 순간들이 우리 날들에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말이다.
톰은 결과적으로 썸머의 타이밍을 놓쳤다. 대신 톰은 어텀을 만나는 새로운 타이밍을 잡았고, 썸머는 또 다른 인연을 만나는 타이밍을 만난다. 타이밍의 뜻은 “가장 좋은 순간을 잡아 동작을 취하는 것”. 그말마따라 이 영화는 운명이라는 전제보다 이 타이밍이라는 키워드를 더 큰 의미의 대전제로 세운다. <누가> 나타나느냐보다 <언제> 나타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구체적인 그림을 그린다. 이렇고 저렇고 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 미지의 사람을 기다린다. 그런데 그렇게 정해둔 사람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나타난다 하더라도 썸머처럼 사라져 버린다. 왜 그럴까? 사실 내가 멋대로 상상한 그 사람은 실제 나와 맞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무엇보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가장 좋은 순간이, 그 사람의
가장 좋은 순간과 맞아떨어져야 때문이다. 그 타이밍을 맞추기란 쉽지 않다.
이 부분은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든다. ”그럼 대체 사람을 어떻게 만나냐“라고 이야기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해법이 있다. 상대의 마음을 내가 조종할 수는 없으니, 중요한 건 나의 태도다. 단순하다. 먼저 나를 알고 나의 가장 좋은 순간을 최대한 늘려야 한다. 순간순간을 나의 타이밍으로 만드는 것이다. 상대가 나를 발견할 수 있게끔 말이다. 그리고 그 타이밍의 순간에, 이제 나가 상대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을 만들어야 한다. 설사 그 사람이 “가장 좋은 순간”이 아니여도, 그 원석을 발견할 수 있다면 타이밍의 확율은 비약적으로 커진다. 톰은 몇 번의 대화를 섞고 어텀을 발견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편견에 가둬 내 상상 속 인연에 집착할 뿐 진짜 인연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운명의 사랑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찾아내고 발견해 내는 것이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돌아 어텀에게 말을 건 톰처럼.
<500일의 썸머>는 어떻게 사랑이 실패하는지 처절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우리도 언젠가 겪었던 바로 그 경험 말이다. 하지만 그를 통해 우리는 관계의 균형감각을 알게 됐고, 상대를 통해 나를 더 잘 알게 됐으며 서로의 타이밍 안에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오늘의 실패는, 마치 톰처럼 내일의 어텀을 만나기 위한 것일 뿐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