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로 보는 사랑의 법칙
사회가 현대화되기 전부터, 사람은 문화와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뿌리 깊은 체제에 반항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찌감치 외톨이가 되었을 테니. 모두가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문화는 더 강해지고 관습은 짙어진다. 잘못된 것을 알아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 혼자서는 말이다. 혼자서는.
<폭삭 속았수다>의 장면들을 보면서 가장 크게 든 생각은, 작가가 그 관습에-체제에서 힘들게, 어쩌면 힘든지도 모르게 견뎌온 이들을 드라마에서만이라도 구해주고 싶었구나, 였다.
애순의 딸을 해녀로 키우고 싶은 할머니에게 반항하며 관식이 말한다.
애순이 나랑 살러 왔지
이 집 며느리 살러온 거 아냐
앞으로 애순이 볼 생각 마요
관식이 너무 판타지스러운 인물이라는 평이 많다. 그 시절에 그런 탈가부장적인 인물이 있을 수 있냐고 말이다. 나는 작가가 그래서 더더욱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 시절을 살았을 엄마들에게는 관식이 없었기 때문에, 관식을 통해 엄마의 젊은 시절을 구원하고 싶은 것이다. 일종의 한풀이처럼 말이다.
하지만, 관식은 일방적으로 애순의 구원자가 아니다. 흔한 클리쉐처럼 백마 탄 왕자는 더더욱. 애순도 관식의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관식과 애순은 서로를 끊임없이 구원한다. 구해주고, 살펴주고, 치료하고, 사랑해 준다.
혼자서는 그 가난과 그 관습과, 편견과 슬픔을 절대로 견뎌낼 수 없다. 애순과 관식 둘이 서로를 구원했기에 그 긴 터널을 함께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가가 정말 ’사랑의 본질‘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를 구원하자
사랑이 뭔지 묻는다면, 나는 단순하게 “상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루만지는 것. 거창한 사랑이란 개념에 너무 쉬운 것 아니냐거 하겠지만, 절대로 절대로 쉽지 않다. 어루만진다는 순간에는 ‘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온전히 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이 아주 작은 한 톨의 슬픔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상처가 난 곳이 있다면 자기의 피를 발라주는 것이다. 그게 어루만지는 것이다. 좋은 예가 애순과 관식의 젊은 시절 야기다.
그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살핀다. 사람이란 존재는
본디 이기적이어서 나의 힘듦, 나의 슬픔, 나의 고통과 나의 분노에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남의 슬픔과 힘듦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나아가 왜 나의 것을 알아채지 못하냐고 상대를 질책한다. 좋은 예가 드라마의 거의 유일하게 등장한 빌런 “학씨” 아저씨다. 그는 좋은 배경을 갖고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었지만, 행복하지 않다. 남의 사정을 들여다볼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삶과 세상이란 무조건 “자신 위주”기 때문이다. 비극은, 사람이란 절대적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강해 보이는 존재라도 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구원을 통해 안식을 얻을 수 있는 필연의 존재다. 누군가의 위로와, 누군가의 사랑이 우리를 하루 더 살게 하는 것이다.
서로의 구원자가 된 애순과 관식이 그래서 더욱 귀해 보이는 것이다. 사랑한다,라고 말하며 서로의 미래를 약속한 수많은 연인들도 많이들 도달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니까. 눈앞에 있는 이가 자신의 구원자임을 알아보지 못하면서 말이다.
맨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시대에,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구원자 찾기가 더더 필요하다. “너를 구원할게. 너도 나를 구해줘”라고 말이다. 서로에게 애순이 되고, 관식이 되어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