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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치질 탈출기

걸리지 마세요 항문에 양보하세요

by ASTR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은 그 무렵이었다. B의 생일이었고, 손에 든 짐이 무척 많았고, 버스는 왠일인지 오지 않았던 그 무렵.


내 안에 어떤 생명체가 깨어났다.


1-1 버스에 올라타기 위해 다리를 들어올리자, 내 둔부의 양 골짜기 사이 어둠의 동굴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건, 매우 절박한 울음.


그 녀석은 통증을 물고 태어났다. 허벅지로 타고 내려오는 찌릿함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마른 침을 삼켰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버스 좌석에 무사히 앉았지만, 애써 올린 머리카락이 땀에 절어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B를 만났다.


B에게, 그리고 그녀의 생일에, 날 보며 환히 웃고 있는 그녀의 귀에,


"내가 지금 치질 증상이 생긴 것 같아..."


따위의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둠의 동굴에서 태어난 녀석은 매우 버릇이 없었고, 맘대로 울부짖었다.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깊은 동굴 속에 숨어있었다. 꼭 숨어서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 골짜기 외벽을 벅벅 긁는 것이다.


게다가 오늘따라 앉는 일이 많았다. 버스에 앉았고 카페에서 서점에서 식당에서 앉았다. 앉고 서는데 그곳에 힘이 들어가는지 처음으로 알았다. 알지 못했던 그런 부위들의 합창으로 하나의 움직임이 탄생하는구나. 놀라워라. 그냥 앉고 서는 아주 사소한 움직임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B가 물었다.


"어디 아파? 안색이 안좋은데."


괜...괜찮아. 그 말을 들은 동굴 속 괴생명체는 씨익 웃으며 날 손톱을 세운다. 벅벅.


새디스트. 넌 내 고통을 먹고 자라는, 쾌감을 느끼는 생명체. 네가 아무리 그렇게 날뛰어도 어쩔 수 없는 내 일부라는 걸 일깨워주고 싶었지만,


어느샌가 그 동굴 속 고통의 울음이 반대로 생각했을때 내 일부가 외치는 알람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설빙에서 메론 빙수를 먹을 때쯤 말이다.


불쌍한 나의 골짜기.

불쌍한 나의 동굴.

불쌍한 나의 생명체여.


그렇구나. 너도 나구나. 네모로 썰은 메론을 한 입 넣으며 B에게 말했다.


"똥꼬가 아까부터 계속 아프네."


아, 0.5초 정도 B의 표정이 굳었던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내 이야기를 들은 B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치질일 '가능성'과 아니라면 이러이러한 원인일 것이며, 지금 아프다면 당장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냐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조기 귀가'를 했다. 얼른 가서 고통을 좀 달래보라는 'B의 걱정'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따뜻한 물로 좀 적셔보면 괜찮지 않을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훌렁 벗었다. 화장실에 따뜻한 물을 받은 뒤, 쪼그려 앉아 나의 그것을 만날 준비를 했다. 눈을 감고 최대한 경건하게. 화장실에는 이상하게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내 그곳을 만지면서 이렇게 긴장한 적이, 아니 평소에 만질 일도 없지.


나는 조용히 그곳에 손을 갔다댔고, 동굴 밖으로 머리를 삐죽 내민 그 녀석을 만날 수 있다. 안녕,


네 이름은 뭐니.


난 외치핵. 반가워. 그냥 치핵이라고 불러.


아까부터 울던 녀석이 너구나. 후후.


미안해. 나란 놈이 그렇지. 고통을 먹고 자라나거든.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얼마 동안 그 동굴 안에서 머물거야?


얼마 안 있을거야. 내 수명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돼. 길어봤자 5일 정도 될까. 그걸 알면서도, 네 몸을 괴롭히는 건 그리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야.


네 몸이라니. 넌 '내 몸'이야.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살아있는 동안,


잘 지내보자.


그렇게 그 녀석은 내 몸안에 함께 살게 됐다. 이따금 자기도 주체 못하는듯 고통을 발사하지만,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성량에 어쩔 수 없이 그 녀석과의 이별을 상상하게 된다. 잘지내보자라고 말을 건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외치핵. 이 츤데레 같은 녀석.

다음에는 이렇게 슬픈 관계가 아니길.


몸에 생겨나기에 그 또한 처음이라 무척이나 서툴고, 결국 핀잔이나 들으며 결국 연고 따위로


점점 작아지는 너에게,


안녕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