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에서 네 가족이 보낸 소소한 크리스마스 일상.
- 12월 22일부터 1월 13일까지 본업과 육아의 이유로 부득이하게 매주 목요일 연재가 힘들어졌습니다. 3주 동안 익숙하지 않은 업무에 적응하느라 에너지를 소진 중이라 글을 쓸 여유가 없는 날이 있을 수 있으니 양해 말씀 드립니다.-
연말부터 내년 초까지 수간호사의 휴가를 커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동안 하루 이틀씩 그녀의 부재를 채우는 역할을 했던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서 병동에서 그녀의 자리를 지키는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시작 전부터 내 머릿속은 여러 가지 최악의 상황을 시뮬레이션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지난 3일 동안 병동은 특별한 문제없이 돌아갔다.
수간호사에게 인수인계를 받으며 새롭게 배운 점들도 많았다.
그녀의 하루는 수많은 회의들로 채워져 있었다.
극 내향인인 나로서는 회의에 참여하는 일이 제일 두려웠는데,
3일 동안 해 보니 내가 회의에서 해야 할 역할을 깨닫게 되었고
이 역할에도 점점 더 익숙해져 간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일단 해야 해서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에서 일을 하면 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들 중 하나는
“힘드네… 그래도 일단 해 보자.”
라는 내 마음이 나를 계속 성장시켜 왔다는 것이다.
숨도 안 쉬어질 만큼 두렵던 상황도 계속 마주하다 보니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무뎌진다.
모든 일은 결국 그렇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니
일단 두려워도 해 보면 된다.
각설하고, 그런 이유로 2025년 크리스마스는
몇 년 만에 가족들끼리 온전히 보내는 시간이 되었다.
매년 크리스마스 휴일마다 휴가 수당의 달콤함에
자처해서 근무를 지원했었는데,
이번 해는 평일 근무를 해야 해서 휴일을 모두 오프로 받았다.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버킷 리스트를 하나하나 이뤄주기로 계획했다.
받고 싶어 하던 선물들을 남편과 몰래 미리 사서 포장해
트리 앞에 진열해 두었다.
아이들이 신나서 포장을 뜯고 선물을 가지고 노는 동안
크리스마스 브런치를 준비했다.
큰아들은 버터를 발라 토스트를 굽고,
남편은 베이컨과 소시지를 굽고,
나는 계란프라이를 하고 샐러드와 베이크드 빈즈를 준비했다.
주말에 온 가족이 모여 아침 식사를 하는 일도 오랜만이었다.
식사 후에는 큰아이가 하고 싶다던 젤리빈 보드게임을
온 가족이 탁자에 둘러앉아 함께 했다.
복불복 게임 같은 것이었는데,
같은 색깔의 젤리빈들 중 맛있는 젤리빈과 먹기 괴로운 기상천외한 맛의 젤리빈들이 섞여 있었다.
색깔만으로는 젤리빈이 어떤 맛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코딱지 맛, 오래된 양말 냄새 맛,
양파와 간 맛, 불에 탄 타이어 맛 등등.
설마 장난이겠지 했는데,
정말 적혀 있는 그대로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괴상한 맛이 났다.
몇 초도 입에 물고 있기 힘들었다.
제일 빨리 뱉는 사람이 꿀밤을 맞았다.
남편은 돈을 내고 내가 왜 이런 고문을 받아야 하냐며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깔깔대며 웃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행복했다.
게임이 끝난 후에는 돗자리와 간식거리를 챙겨 해변으로 나갔다.
바닷가 앞에 돗자리를 깔고 파도 소리를 들으며
과자와 음료를 나눠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은 모래사장에서 모래를 만지며 놀고
바닷물에 발도 담가 보았다.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라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고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많은 고통을 받으신 뒤 인간을 구원해 주신 분이라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했다.
성경 속 예수님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우리에게
그렇게 큰 사랑을 주셨다는 사실이 너무 감동적이라고 말했는데,
무신론자인 남편에게 얼마나 와닿았을지는 모르겠다.
나와 아이들이 노는 동안
남편은 돗자리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했다.
놀이터에서 한참 놀고 킥보드도 타다가
비가 올 것 같아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영화 「나 홀로 집에」를 보았다.
전날 마트에서 산 파블로바 케이크에
크림과 블루베리를 얹어 한 조각씩 먹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양치하는 일로
작은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겨우 마치고 잠이 들었다.
특별한 일 없이 흘러간 하루였는데,
가족들과 함께여서인지
유난히 특별한 하루였다.
문득 가족들과 바닷가에서 보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돗자리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듣는데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아들이 바람이 시원하다고 말하자
예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소설 한 구절이 떠올랐다.
『러블리 본즈』라는 소설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소녀가
영혼이 된 채로 깨어나는데,
예전에는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땅을 밟던 발의 감촉,
얼굴을 식혀 주던 시원한 바람,
바닷물의 짠맛,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게 되자
그것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졌다는 이야기였다.
아이들에게 소설 속 그 구절을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 살아 있고,
건강한 몸으로 이 모든 것을 누리는 내가
지금 가진 것들에 감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2025년도 이렇게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부자는 아니지만
아직도 플러스의 인생을 살고 있진 않지만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만큼의 여유는 생긴 것 같다.
절약하며 사는 일이
어쩔 때는 나를 움츠려 들게 만드는 날도 있었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모든 것의 이유는
내가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남이 가진 것과 비교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내년에도 나는 부디 나의 마음에
우리 가족들의 마음에 평화가 깃들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내 삶에 감사하며 살기.
다른 이의 삶과 나의 것을 비교하지 말기로 다짐 또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