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 우주론의 한계
빅뱅 이론은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우주를 잘 설명하는 굉장히 성공적인 이론임에도 여전히 아쉬운 점은 있다. 그 아쉬운 정도는, 우리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어디서 멈출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빅뱅 이론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게 많은데, 뭐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라?'라고 하면 크게 아쉬울 일이 없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를 계속 캐묻기 시작하면 어딘가에서는 찜찜한 느낌을 뒤로 한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다.
인플레이션 우주론의 창시자인 앨런 구스의 이 말은 빅뱅 우주론이 가지고 있는 한계들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빅뱅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몇 가지 가설들이 있을 뿐, 알려진 것이 없다. 이 책을 마무리 짓기 전에, 빅뱅 우주론에 관한 불편한 진실 몇 가지를 얘기해 보기로 하자.
태초에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인류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호기심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빅뱅 우주론은 우주의 시작을 설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시간이 0이었을 때 우주의 무한한 밀도와 온도를 기술할 방법이 없다. 이는 물리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특이점 문제이다 (블랙홀도 일종의 시공간의 특이점에 해당한다). 스티븐 호킹의 일생을 다룬 영화 Theory of Everything (원제는 '만물의 이론'이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는 내용과 맞지 않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란 제목을 달고 개봉되었다)에 보면 스티븐 호킹이 당시 캐임브리지 대학에서 로저 펜로즈의 블랙홀 특이점에 관한 발표를 듣고 이에 영감을 받아 특이점 개념을 우주에 적용하기 위해 고민하는 장면이 나온다. 펜로즈는 일반 상대성이론이 맞다면 중력 수축의 결과로 생기는 무한히 작고 밀도가 무한히 큰 상태 (블랙홀)는 수학적인 허상 (단지 어떤 물리량을 표현하는 식의 분모가 0이 되어 버리는)이 아니라 그 실체가 있는 물리적인 현상임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다 (즉, 블랙홀은 실제로 존재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팽창하는 우주의 성질'을 주제로 한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스티븐 호킹은 블랙홀의 형성과 유사한 이유로, 우주 역시 특이점에서 시작해야만 함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였다. 특이점으로서의 우주의 시작을 기술할 적절한 방법은 없지만 그 실체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관측되는 현재 우주는 공간적으로 평탄하다. 기하학적 곡률이 0에 아주 아주 가깝다. 우주의 내용물의 양이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절묘하게도 우주가 평탄할 만큼이다. 잘 생각해 보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일이다. 마치 손가락 끝을 연필 중앙에 올려놓고 균형을 잡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현재 우주는 연필이 균형을 잡고 손가락 끝에 놓여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열린 우주도 아니고 닫힌 우주도 아닌, 어느 쪽으로도 쏠리지 않고 그 둘의 경계인 평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빅뱅 이론은 우주가 초기에 고온 고밀도의 상태로 시작해서 식어가면서 물질이 생겨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지만, 우주 공간의 기하학을 결정하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만든 것은 아니지만, 빅뱅 이론하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모순되는 현상을 설명하려던 앨런 구스는 빅뱅 이전에 이미 우주를 엄청나게 크게 팽창시키는 인플레이션이라는 과정을 도입하였고 그 결과 빅뱅 시점에서 우주는 이미 곡률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곡률을 0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크게 부풀어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평탄한 우주의 문제를 에둘러 피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껄끄러운 부분은 있다. 인플레이션 당시 과거에는 작았던 우주가 현재 크기로 팽창을 해왔는데도 (무려 10의 54승 배나 차이가 난다) 여전히 평탄하다면 과연 초기에는 얼마나 완벽에 가까울 만큼 평탄했어야 했는지 생각해 보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이 우주는 너무나 정교하게 조정돼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실 지금의 빅뱅 우주론은 원래의 빅뱅 아이디어와 인플레이션 아이디어가 합쳐진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그 결과로 우주가 어떻게 해서 현재와 같은 평탄한 공간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연구가 필요한 질문이다.
빅뱅 우주론은 우리가 현재 전자기파를 통해 관측할 수 있는 바리온 물질 (별과 은하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지만, 현재 관측되는 우주의 거대구조에 바탕을 둔 관측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의 존재를 예견하지는 않으며 이들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한다. 암흑 물질과 암흑에너지가 존재한다는 간접적인 증거는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관측 사실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빅뱅 이론은 침묵한다.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라는 것이, 현재 알려진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으면서 빅뱅 이론의 프레임 안에 들어있는 구성원의 하나로서, 그동안 우리가 몰랐을 뿐 단지 그 정체가 밝혀지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존재 자체가 새로운 물리 법칙을 요구하며 빅뱅 우주론을 수정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거의 모든 물리학 이론들이 그러하듯이 빅뱅 우주론 역시 완전하지 않다. 하지만 빅뱅 이론은 피블스가 말한 '공허한 추측'에서 '생산적인 추측'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실제로 많은 관측사실들을 잘 설명하고 있는 매우 성공적인 이론이다. 빅뱅 우주론이 탄생한 1900년대 초반은 물리학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새롭게 등장한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이 기존의 물리학 법칙들을 흡수, 통합하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버렸다. 그렇게 커다란 변화가 물리학에서 앞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 기반한 빅뱅 이론이, '우리 우주'를 포함함 여러 우주 (다중 우주가 있다면)를 설명하는 보다 일반적인 이론 (그러한 이론이 있다면)에서 파생한 특수한 이론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공허한 추측'을 해 볼 수도 있겠지만, 과연 그것을 공상이 아닌 '생산적인 추측'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결국에는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 것 같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 기반한 빅뱅 우주론이라는, 이미 확고히 자리 잡은 세계관 안에서 교육받고 연구하며 살아온 필자는 그 틀을 부수고 나갈 수 없겠지만,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고 공허한 추측과 생산적인 추측사이를 탐험할 용기를 가진 미래의 젊은 과학자들은 아마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부러움이 섞인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