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천문학자를 위한 채찍
데드라인(deadline)의 본래의 뜻은 말 그대로 '넘어가면 죽는 선'이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포로들을 수용할 공간이 모자라 이들을 선을 그은 구획 안에 모아놓고 그 선 바깥으로 나가는 포로들은 사살했다고 하는데, 이 말을 나중에 신문사에서 기자들에게 원고마감을 종용하기 위해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현재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네 인생에는 수 없이 많은 데드라인(deadline)들이 놓여있다. 학생들에게는 숙제나 과제제출 마감일, 직장인들에게는 보고서, 기획안 제출 마감일, 작가들에게는 원고 제출 마감일이 그것이리라. 마찬가지로 천문학자들에게도 데드라인은 있다. 망원경을 사용하기 위한 관측제안서나 연구비를 얻기 위해 필요한 연구 제안서를 제출하는 마감일이 있고, 논문을 투고했을 경우 심사과정에서 수정, 보완을 해서 다시 제출해야 하는 제출마감일이 있다.
필자가 아는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은 이 데드라인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다. 필자도 관측제안서 마감일이 다가올 때마다, 밀린 숙제를 하듯이 마감 시간 하루 직전까지 (이 경우는 그나마 양반이다), 혹은 몇 시간 전까지 숨 넘어가듯이 일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이렇게 누군가 남이 세워놓은 데드라인에 맞추어 살아가고 있을 뿐, 초등학교 때 만들었던 생활계획표 말고는, 어른이 되고 나서 내가 스스로 세운 데드라인에 맞추어 살아가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세운 목표, 그리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내가 스스로 세워놓은 엄격한 데드라인이 있었던 적은 대학원 시절이 마지막이 이었던 듯싶다.
살면서 크던 작던 여러 가지 목표는 있었지만,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데드라인이 없었기에 자연스레 내가 계획했던 일들이, 남들이 세워 놓은 데드라인에 밀려서 흐지부지 되는 일이 많았고, 시간 날 때마다 할 수 있는 만큼 노력을 해도 목표를 달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데드라인이 없으면 일에 집중을 못하고 일을 질질 끌게 되며 일의 효율도 생산성도 떨어진다.
천문학자들의 경우, 보통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5-6년), 박사 후 연구원 과정 (2-3년)을 거치는 동안은, 주어진 몇년의 시간 내에 논문을 써서 출판해야 하므로 알게 모르게 데드라인의 압박을 받으며 일을 해나간다. 하지만, 대학교나 연구소에 자리를 잡고 고용불안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사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좋아서 시작했던 천문학 연구는, 연구 외에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게 되면서, 더 이상 속도가 나지 않는다. 무언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스스로 데드라인을 세우고 그에 맞추어 일을 해야 한다. 필자도 여기 브런치에 일주일에 한 번 천문학 글 (일요일에 만나는 천문학)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아직까지는 다행히 (?) 스스로 정해놓은 데드라인을 어긴 적이 없다.
내가 계획한 일을 스스로 정해놓은 마감시간 안에 끝냈을 때 느끼는 뿌듯함은, 과제물을 다해서 마감시간에 맞추어 제출할 때,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만들고 다음날 회의시간 전에 파일을 업로드할 때, 약속한 글을 신문사나 출판사 마감시간 전에 보냈을 때, 관측제안서를 마감시간 전에 제출했을 때 느끼는 안도감과는 달리, 나 자신에 대한 대견함으로 이어지고 다음 일도 잘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다. 지금 쓰는 이 글도 이른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안에 끝내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데드라인을 넘겨버렸다. 하지만 마냥 붙잡고 있었다면 언제 끝냈을지 모를 일이다. 이제 일 모드로 전환해야겠다. 오늘 중으로 끝내야 할 논문 수정작업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