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누구에게나 추억은 있다. 살아온 자취가 길어질수록 추억도 많아지게 마련이다. 삶에서 우리의 기억이 온전할 동안 추억은 언제든지 열었다 닫을 수 있는 앨범 속의 사진들과도 같지만, 그중 몇몇은 찬찬히 보며 되새김질을 하고 싶게 만든다. 필자에게는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했던 FM 영화음악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바로 그렇다 (찾아보니 FM 영화음악은 여러 DJ들을 거치며 지금도 방송이 되고 있다).
FM 영화음악은 정은임 아나운서가 처음부터 진행한 프로는 아니었지만, 그녀가 진행하는 동안 많은 마니아들이 생겨난 라디오 프로이다. 프로그램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의 OST를 틀어주며 영화얘기도 하고 사람 사는 얘기도 하는 라디오 프로였는데, 새벽 1시에 방송하는 라디오 프로라서 청취자들을 많이 불러 모으기 힘든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충성스러운 애청자들을 거느렸던 라디오 방송이었다.
1992년부터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을 시작했는데, 그때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필자는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매주 금요일, 토요일 밤마다 "마이마이" (그 당시 유행하던 휴대용 카세트 라디오)로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이다"라는 인사말로 시작하는 프로. 정은임 아나운서는 새벽과 참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와 분위기를 감싸 안는 따뜻한 목소리....
주중에는 다음날 학교를 가야 했기에 부득이하게 주말에만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방송을 듣는 한 시간은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것들을 많이 주워들을 수 있어서 나름 소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비교적 덜 알려진, 유명하지 않은 영화들도 소개해주고 이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그늘진 모습을 살짝살짝 비춰주는 정은임 아나운서 특유의 진행은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방송을 듣고 나면 오래가는 여운을 남겨주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 대학교에 입학하던 해 봄, 정은임 아나운서는 FM 영화음악을 떠났다. 프로그램은 계속 방송되었지만, 친구와 같이 놀던 놀이터에서 친구 없이 혼자 노는 것 같은 허전함과 달라진 생활 패턴 때문에, 차츰 뜸하게 듣다가 더 이상 그 프로를 듣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다가 몇 년이 지나 유학을 위해 출국 준비를 하던 7월 말 여름, 갑자기 정은임 아나운서의 사고 소식을 뉴스로 듣게 되었고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미국에서 들었다. 그때는 정말 큰 충격이었고 학창 시절의 소중한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 같이 허무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억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그러다 오늘 휴대폰에 뜨는 뉴스를 검색하던 중, 작년에 있었던 정은임 아나운서 20주기 특집 공개 방송 기사를 보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오랜만에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어 보았는데, 혹시 못 알아차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무색하게 정말 거짓말처럼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함께 했던 라디로 프로그램이고, 유학 가려고 한국을 떠나오던 때 하늘나라로 가버린 좋아하던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오늘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되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나서, 추억의 앨범을 그냥 덮을까 하다가 여기에 몇 자 남겨본다.
생각해 보니, 당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학창 시절을 잘 보냈고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좋은 라디오 프로를 진행해 줘서 고맙고 부디 하늘나라에서 계속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