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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Jun 13. 2023

할머니

"어여 먹그라“


새들의 쫑알거림이 스테레오처럼 울려 퍼진다. 나무들이 춤을 추는지 이파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다. 그 와중에 매미는 제 목소리가 제일 크다고 뽐내느라 정신없다. 쉴 새 없이 헉헉대느라 들락날락하는 공기 속에서 할머니 냄새가 난다.


땀을 뻘뻘 흘리는 나에게 할머니는 앉지도 못하고 급하게 밥을 담은 그릇을 내민다. 커다란 숟가락이 자기도 있다고 철그렁 소리를 낸다. 깜짝 놀랄 정도로 차가운 밥그릇 속에는 시원한 물속에서 기분 좋게 유영하는 허연 밥알들이 보인다. 할머니네 집 물은 흔한 수돗물이 아니라 산에서 끌어온 약숫물이었다. 한 여름에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급하게 들이마실라치면 순식간에 머리가 띵 해지는 것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리 할머니네 집은 버스도 들어가지 않는 산속 깊은 곳에 있었다. 한참 멀리 떨어진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걷노라면 한 겨울에도 땀이 뻘뻘 났다. 어릴 때는 버스만 타고 오는데도 멀미가 나서 중간에 한참을 쉬었다. 자주 오지 않는 버스 탓에 하루를 꼬박 걸려 오는 적도 있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 길 끝에서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네 집이 꼭 나를 반겨줄 테니까.


“왔나.”


어딘가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고 내뱉는 할머니의 외마디 인사에는. 오만가지 감정이 섞여 있다. 반가움. 이 멀리까지 고생하며 온 것에 대한 미안함. 있는 동안 잘 지내자는 다짐 같은 것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나도 감정을 실어 할머니께 답한다.


“응!”


할머니에게선 늘 산 냄새가 났다. 할머니 옆에 가만히 앉아 킁킁대고 있으면 콧 속으로 쫑쫑대며 지저귀는 새소리며 시원하게 졸졸거리는 소리가 들어왔다.


그 해 여름. 연례행사처럼 여름방학을 맞아 홀로 할머니를 따라 할머니네 집에 왔다. 늘 긴 여름 방학의 반쯤을 할머니댁에서 보내곤 했다. 작년까지는 아빠와 엄마가 일주일쯤 함께 지내다 가셨다. 그 해는 달랐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어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 것처럼 행동하던 때였다. 이제 다 커서 괜찮다며 호기롭게 혼자서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산에서 생활하시는 할머니의 발걸음은 생각보다 빨랐다. 늘 아빠와 엄마와 함께 와서 중간중간 한참이나 쉬며 올라가느라 힘든 줄 몰랐었다. 할머니는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이따금 뒤돌아보며


“니 괜찮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몸이 뜨거웠지만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나보다 작고 나이도 많은 할머니보다 내가 못 올라갈까 싶었다. 할머니와 둘이 쉼 없이 올라가는 산길은 늘 오던 길보다 가파르고 험하게 느껴졌다. 처음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산에 들어가면서 서늘하다고 걸쳐 입은 겉옷을 벗어 허리에 질끈 동여맸다.


물에 만 밥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개다리소반 위에 덜렁 얹혀 있던 매콤하고 짭짤한 이름 모를 야채에 자꾸만 손이 갔다. 꽉 짜진 행주처럼 소금기를 빼낸 몸이 달라고 아우성을 쳐댔다.


"니 내랑 이불 좀 하나 만들자."


"이렇게 더운데 무슨 이불이야. 수건 하나 덥고 자면 되지."


"내 좋은 꿈 꾸게 해주는 이불 만들어줄라카니."


할머니는 그새 밖에 나가시더니 쭉쭉 뻗은 옥수수를 한 소쿠리 꺾어 오셨다. 수염이 복슬복슬한 통통한 녀석들이었다. 특별히 잘 여문 옥수수를 골라서 따 온 것이리라. 우리는 김이 폴폴 나는 샛 노랗고 달큼한 옥수수를 호호 불어 먹어가며 여름 이불을 만들었다. 귀찮아서 바늘 중에 제일 큰 걸 골라서 듬성듬성 꿰맸다. 할머니는 옥수수 물처럼 노릇한 천을 눈앞에 들이대고 바늘을 열심히도 놀리셨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밤을 연주하는 풀벌레들 소리에 고개를 드니 밖이 벌써 어둑했다. 


나중에 다 만들어진 이불을 보니 사방 귀퉁이에서 시작해서 여름에 나는 풀들이 한가득 자라나 있었다. 눈이 좋아진다며 검은 봉지 가득 늘 들고 오시던 어성초. 깨알같이 하얀 꽃도 피어 있었다. 머리위로 피어나던 미니 호박꽃 같은 노오란 수세미꽃, 보랏빛 줄기가 선명한 가지. 하나같이 여름마다 놀러오면 보이던 것들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잠들고 나서도 형광등불에 의지해서 수를 놓으셨던 모양이었다.


몇 십 년 만에 더위 어쩌고 하는 바람에 그 해 여름은 방학이 다 끝나도록 할머니 집에 머물렀다. 특별했던 여름방학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할머니는 그 해 겨울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심근경색이라 했다. 할머니는 환하게 웃는 영정사진으로만 만날 수 있었다. 이제 할머니에게서는 향 냄새가 났다. 얼굴을 볼 때마다 니 괜찮냐고 묻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할머니와 만든 여름 이불이 유품처럼 남았다. 즐거웠던 할머니와의 마지막 여름이 떠올라 한 번도 덮지 않은 이불. 할머니네 집 여름 풀들이 가득 수놓아져 있는 이불.


이제 나는 어른이 되어 홀로 독립해서 회사를 다닌다. 집을 나올 때 할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여름 이불을 가져와 옷장 속에 고이 모셔두었다. 피곤에 지쳐 땀에 절은 모습으로 집에 온 날이었다. 밤늦게까지 매미소리가 시끄러웠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어던지다 천둥 치듯 울려대는 뱃소리에 저녁을 먹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손만 대충 씻고 밥통 속에 남아있는 밥을 탈탈 긁어 커다란 그릇에 담았다. 차가운 수돗물을 틀어 밥을 씻으며 그 여름 할머니가 생각났다. 그때 먹었던 맵고 짭조름했던 나물반찬이 그리웠다. 수돗물이 튀었는지 눈가에 물이 흘렀다. 어설프게 혼자 담아 물김치와 구별이 안 되는 김치와 함께 밥을 먹었다. 조막만 한 거실에 대충 훌러덩 누웠다. 내일은 주말이라 안 씻고 잔다 한들 상관없었다. 차가운 밥을 먹어서인지 배가 살살 아픈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옷장 속에 넣어 뒀던 할머니의 여름 이불을 가지고 왔다. 오랜만에 보는 이불에는 여름마다 놀러 가서 보던 풀들이 가득했다. 할머니네 집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할머니와 덮어봤을 때는 온몸을 덮고도 남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발이 다 튀어나온다. 우스웠다. 눈을 감았다.


"할머니 손이 약손"


어디선가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고개를 돌린 곳에 할머니가 보였다.


"잘 있었나."


목이 막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앞이 자꾸만 뿌예져서 오랜만에 본 할머니 모습을 놓칠 세라 열심히 눈을 깜빡였다. 기분 좋은 산 냄새가 퍼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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