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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Jul 18. 2023

절규

현기증이 났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전화기로 남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더니 이젠 질려버렸다. 늘 펼쳐져 있는 이불 속에 들어가 까실대는 감촉을 느끼며 데굴대다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잤다. 깨우러 오는 사람이 없으니 쉬이 일어나 지지가 않았다. 저절로 눈이 떠지면 다시 감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햇살이 쏟아지던 창밖에서는 어둠이 내려앉더니 다시 밝아졌다. 갈수록 떠진 눈을 감기가 힘들어졌다. 눈이 말똥말똥 해지면서 뜬 눈이 감기지 않았다.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속이 느글느글했다. 잠만 자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욕지기와 함께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느글대는 뱃속을 잠재우려고 식당을 물색했다. 매운 건 싫고 밥은 씹는 게 귀찮고. 라면은 뜨겁고. 문득 세숫대야 가득 들어찬 거뭇한 면과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국물이 떠올랐다. 그래. 물냉으로 하자. 식초를 팍팍 뿌려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게를 찾았다. 언뜻 ‘세숫대야 냉면’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다 싶어 들어갔다. 


“물냉 하..”


분명히 냉면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벽에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눈을 의심했다. 잠을 이상하게 잤더니 정신도 맛이 간 것 같았다. 한숨을 내 쉬며 들어온 문으로 나가려고 등을 돌렸다. 


“세숫대야 냉면처럼 시원하고 맛있는 그림들이 가득한 세냉 아틀리에입니다.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세냉이라니 어이없는 작명센스 좀 보소. 손을 휘저어 아니라는 신호를 보내고 나가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캬아... 반듯이 각 잡아 입은 감색 정장과 깔끔하게 틀어 올린 머리. 빨간 립스틱이 반짝이는 입술. 만화책을 보며 이상형으로 잡아뒀던 모습의 여인이 거기 서 있었다. 뇌가 제멋대로 몸을 돌리더니 입을 놀렸다. 마지막에 사람 좋은 미소를 띠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괜찮은 그림이 있으면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그림에는 문외한이라서요.”


“그럼요. 따라오세요. 오늘은 특별한 그림이 전시되는 날이거든요. 아마 마음에 꼭 드실 거예요.”


그녀는 길쭉한 하이힐을 신고도 또각대는 소리하나 없이 걸었다. 우리는 전시장 가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겉보기에 정사각형 공간인 줄 안 이곳은 놀랄 만큼 길쭉한 공간이었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휙휙 지나쳐가며 한참을 걸었다. 거짓말 안 보태고 한 10분은 걸은 기분이었다. 손목에 늘 차고 있는 만보기가 1500 가까이 늘었으니 시간으로 따지면 10분 정도 될 거다. 


그녀는 낯이 익은 그림 앞에 나를 세웠다. 뭉크의 절규던가. 해골 같은 사람이 양손을 귀에 갖다 붙이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진품인가. 


“이건 세상에 소개된 적 없는 작품이에요. 오늘 여기서 처음 공개되는 겁니다.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 원본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 원본을 수정해서 다시 그린 것이 거든요. 이 뒤에 보시면 다리 위를 걷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저승사자로 표현돼요. 새카만 그림자같이 표현되어 있죠. 얼굴 부분이 불타오르는 것 같은 하늘과 같은 색을 하고 있는 걸 알 수 있어요. 뭉크는 붉은 하늘을 보고 죽음의 공포를 느꼈거든요. 그것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이 이 원본이에요.”


듣고 보니 그랬다. 뒤에 그려진 검은 형상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 섬뜩했다. 하늘이 피칠갑을 한 것처럼 덕지덕지 붉은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다. 원래 이랬던가?


“뭉크는 자신의 그림이 무서워졌어요. 그래서 액자에 반듯이 꽂혀 있던 그림을 내 던져 버렸죠. 그 바람에 틀어진 액자로 남았어요.”


그림을 보고 있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원래 내 그림이어야 할 것 같은 느낌. 꼭 가져야만 할 것 같은 느낌. 방정맞은 입이 제멋대로 지껄였다. 


“이거 파는 건가요?”


“네. 아직 정확한 값어치가 정해지지 않았지만, 구입 가능하십니다.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이라 값을 매긴 적이 없어요. 원하는 가격을 지불하시면 됩니다."


“정말요?”


“네. 가격은 얼마든 상관없습니다.”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요즘은 전화기만 있으면 뭐든 살 수 있어서 지갑은 없애버린 지 오래였다. 


“전자 화폐 같은 거 되죠?”


“현금만 받습니다.”


절망적이었다. 주머니란 주머니는 다 뒤졌다. 100원. 지난번에 길바닥에서 주워 주머니에 넣어둔 채였던 동전이 하나 나왔다. 이런 행운이 있나. 


“저... 100원 밖에 없는데... 가불. 가불 같은 거 되나요?”


“100원에 구입 가능하십니다. 그럼 포장해 드릴까요?”


나는 묘하게 끌리는 뭉크의 절규 원본이라는 그림을 내 방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놨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시간을 잊은 채 그림을 쳐다보았다. 절규하고 있는 인물이 내 얼굴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을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림 속 뭉크는 내가 되어갔다. 곱실거리는 머리가 자라나고 잘근잘근 깨물어 시커먼 흉이 저 있는 입술도 디테일하게 그려져 있었다. 전에는 없던 것 같은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올리고 있는 손목에 시커멓게 자리 잡고 있었다. 뭐가 튀었나?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늘 차고 있는 만보기 같은데? 무심코 돌아본 내 손목에 만보기는 어디로 가고 없었다. 만보기를 찾는다며 방을 뒤지다가 어두운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얼굴이 다 어디로 가고 없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양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뭉크의 절규 원본 속 뭉크가 내가 되어 웃으며 그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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