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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nautes 프리나우트 Aug 27. 2023

증거

오늘도 어김없이 팔만슈퍼가 문을 열었다. 동네 터줏대감 황 씨 할머니가 까치발을 들고 셔터를 고정시킨다고 끙끙거린다. 주변에서 그놈의 셔터는 자동으로 좀 바꾸라는데 말도 더럽게 안 듣는다. 맨날 하던 건데 이제 와서 바꿀 필요 없다나 뭐라나. 그놈의 고집. 하긴 80년 넘게 이 동네에서 살고 가게를 한지가 벌써 60년이 넘었는데 들어 먹을 리가 없지만.


황 씨 할머니는 요즘 이 동네가 이상해진 것 같다. 한 20년쯤 전 길 건너 땅딸막한 아파트를 재개발한다고 산을 허물고 사람들을 내 보내기 시작했다. 빈 아파트 6채를 허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이쪽 동네에도 머지않아 재개발이 시작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개중에는 이 참에 한몫 단단히 받아보겠다며 기대감에 부푸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태어나 자란 이곳 풍경이 바뀌는 것도 떠나는 것도 싫은 황 씨 할머니는 번듯하게 양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꼴도 보기 싫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높다란 아파트가 10채나 생겼다. 단지 내에는 커다란 공원까지 있었다. 한가운데에서 분수대가 시원한 소리를 내며 솟아올라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드디어 이쪽 동네에도 재개발을 시작한다며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했다. 보상금과 함께 아파트가 들어서면 최우선으로 분양권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준다는 분양권은 누구나 다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추첨에서 당첨이 돼야만 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아파트에서 한번 살아보겠다며 신이 나서 집을 내주었다. 주택에서 사는 일은 손이 많이 가서 영 편하지가 않았다. 황 씨 할머니는 5년이나 걸려 짓는다는 아파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은 자고로 땅을 밟아야 하는데 공중에 떠서 살라니 말이 되느냔 말이다. 게다가 그 사이에 있을 곳을 마련해 주는 것도 아니라 천막이라도 짓고 들어가 살 판이었다. 


황 씨 할머니는 끝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고 살던 동네 사람들도 할머니와 함께 단결해서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활기차던 동네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느라 매일 시끄럽다. 그 와중에 이상한 점이 있었는데, 한 5년 전쯤까지 찾아오던 민성이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디로 간 건지 그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부모라는 사람들은 뻔질나게 돌아다니는 걸 보면 이사를 가거나 한 건 아닌 듯했다. 그들은 동네에 새로 나타난 양복을 잘 차려입은 사람들에게 늘 들러붙어 있었다. 5년 전쯤 몇 살 됐냐는 물음에 고사리만 한 손가락을 4개 들어 올렸으니 이제 9살이 될 터였다. 그러면 학교를 가도 갈 것인데. 이 슈퍼를 지나지 않고는 가지 못하는 학교는 안 가고 대체 어디 갔냐는 말이다.


황 씨 할머니는 이 동네 사람들 얼굴은 거의 다 기억하고 있다. 길 건너 아파트 사람들이야 하도 바뀌어서 잘 모르지만, 아래쪽 주택가 사람들이라면 누가 뭘 하는지까지 꿰고 있다. 소문에 의하면 민성이네 집에서 가끔 아이 우는 소리와 화를 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밤늦은 시간이라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술 쳐 먹고 다니는 이 씨가 담장에서 오줌을 싸다가 들은 모양이다. 제정신으로 들은 건지 뭔지 모르겠다는 게 문제지만. 민성이에 대해 사람들에게 물어봤지만 다들 어디 친척집에라도 보낸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전에 민성이와 함께 웬 처음 보는 사람이 와서 과자를 한 상자나 사 간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민성이의 이모라고 했는데 팔뚝에서 흔들리는 번쩍이는 팔찌와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들이 호화스러웠다. 그렇다고 고급스러움이 느껴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민성이는 쫀득이를 좋아했다. 황 씨 할머니는 겨울이 되면 난로에 구워달라고 해서 구우면서 하나 얻어먹기도 하고 한 봉지 덤으로 구워도 주고 했었다. 어린 나이에 맨날 500원을 손에 꼭 쥐고 나타나는 것이 그 많은 돈을 어디서 훔친 건가 의심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부모가 맞벌이라 500원을 쥐어주고 나가는 모양이었다. 이 어린것을 혼자 두고 나가다니 제정신인가 싶어 황 씨 할머니는 민성이가 오면 함께 밥도 먹고 가게도 보고 했었다.


황 씨 할머니가 가게에 앉아 멍하니 오지도 않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왠 뻘건 구두를 신은 사람이 들어왔다. 한참 전에 왔던 민성이 이모라는 사람이었다. 잘 보니 뒤에 키가 꽤 커 보이는 아이가 서 있었다.


"아야, 이게 누구여. 민성이 아니야? 언제 이래 컸대. “


민성이의 눈이 잠시 반짝하는 것 같았다. 잘 보니 빼빼 마른 몸에 걸쳐진 옷이 포대자루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얼굴은 햇볕에 탄 건지 뭔지 거무튀튀했다. 눈이 쑥 들어가서 꼭 해골 같았다.


"아이고야. 너 밥도 잘 안 먹는구나. 그동안 뭘 하다가 인제 왔어."


"할머니, 과자 좀 대충 상자에 담아줘요. 10만 원어치."


"민성아. 너 좋아하는 쫀드기 넣어줄까."


"할머니, 이야기는 됐고요. 아무거나 그냥 담아줘요."


여자는 장바구니를 가져오더니 손에 닿는 것을 아무렇게나 담아댔다. 그동안 민성이는 입구에 가만히 서서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황 씨 할머니가 쫀드기를 몇 개 집어 민성이의 주머니에 몰래 넣어주었다. 쓰다듬는 등이 너무 여위어 할머니는 깜짝 놀랐지만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돈을 던지듯이 내고는 휙 돌아서 민성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여보세요? 경찰이죠. 여기. 애들 학대 신고 할라 그러는데. 여다 하면 되나요? 뭐요? 증거? 아니 애가 너무 비쩍 말라가지고 눈에 초점도 없고, 밖에를 안 나오는 거 같아. 어? 안된다고?"


황 씨 할머니는 경찰에 전화를 했지만 증거가 없으면 안 된다며 단박에 거절당했다. 증거다. 그때부터 슈퍼 앞에서 보이는 골목 공용 쓰레기 수거함을 살폈다. 민성이네 부모가 나오는 것이 보이면 쓰레기를 버리는 척 살그머니 살폈다. 아침부터 우중충 한 것이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은 날이었다. 슈퍼 문을 여는데 민성이가 자주 쓰던 공룡이 그려진 우산이 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볼록 튀어나와 이상한 모양으로 휘어 있는 것을 보아 잘 펴지지 않은 우산임이 분명해 보였다. 아끼던 우산이었는데 컸다고 버린 건지... 슈퍼로 가져와서 살피는데 이상한 것이 보였다. 우산 끝부분과 손잡이 부분에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황 씨 할머니는 안경을 써도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우산에 붙이듯이 대고 살폈다.


"여보세요? 경찰이죠. 학대 아동 신고요. 증거? 잡았어. 얼른 와. 와보면 안다니께."


수화기를 내려놓는 황 씨 할머니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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