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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 생각

그릇 위로 높이 담은...고봉밥

by 진이

두어 숟갈 정도 뜨시더니 이네 내려 놓으신다. 그리고는 남은 밥을 그릇째 슬그머니 앞으로 밀어으신다.

“깨끗이 먹었으니까 먹어라. 나는 다 먹었으니까 먹어”

고기 반찬 그릇도 바싹 내 앞으로 내어 주신다.

“그냥 들고 둘러 마셔”

“할머니, 저 많이 먹었어요. 괜찮아요”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한사코 밀어 내신다. 그렇게 먹는걸 보시면서 쉽게 자리를 뜨지 않으신다. 그날 난 참 많이도 먹었고, 빵빵해질 때로 부풀어오른 위장의 도움으로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밥은 참 좋은 것이다. 자세교정도 해주는 외할머니표 고마운 고봉밥.

이때의 일을 외할머니도 기억하실 거다. 그리고 나를 생각하면 배불리 외손자를 먹이신 이 일을 행복한 기억으로 추억하실 거다. 지금 이곳에는 안 계시지만, 정말로 천국이 있다면, 그 곳에서 여기 오기 얼마 전에 즐거운 이야기라며 내 이름을 거론 하실 거다.

누구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시간이라고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시간도 있다. 내가 점점 젊은이가 되어가는 딱 그만큼 우리 외할머니의 시간도 흘러 늙어갔다. 누구에게는 젊음의 시간이, 또다른 어떤 이에게는 늙음이 찾아 드는 것이다. 나이에도 가속도가 있는 것처럼 세월을 타고 할머니의 시간은 훨씬 빠르게 흘러 간 것 같았다. 전보다 더 작아지고 귀도 어두워 지신 할머니.


서울로 대학을 들어가기 전날, 내손을 붙들고

“우야든지 서울대를 가야한다”

비록 서울대는 아니더라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간다고 할머니에게 설명을 드렸다.

그제서야

“잘했다”

라고 연신 칭찬을 하셨다. 어쩌면 서울대와 서울에 있는 대학을 잘못 들으셨을 수도 있지만, 뭐 크게 대수이겠는가..

“엄마, 아버지 말 잘 듣고 효도 해야 한다”

“몸은 괜찮으시냐? 아버지 아파서 죽는다고 그랬을 때 내가 우째야 쓰까, 우째야 쓰가 속으로 그랬다. 그런데 이렇게 건강해져서~”

끝없이 반복하여 이어지던 외할머니 말씀이 생각난다. 긴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하고 짧게 뵙고 돌아설 때면 누가 볼세라 꾸깃꾸깃한 돈을 꺼내어 억지로 내 손에 쥐어 주시곤 했었다. 그걸 받아 들고 나오면서 내 손부끄러워 몇 번을 더 돌아보곤 했었다. 나외할머니는 이렇게 시골 할머니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큰이모 댁에 들리셨던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시커먼 게 들어 오더란다. 삐쩍 말라 턱이 송곳처럼 되어서 꼭 밥도 못 먹고 다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셨단다. 당신께서도 지금은 큰딸 집에 있는 몸이라 마음대로, 주고 싶은 대로 챙겨 주지 못했다 하시더라. 큰딸은 그런 아이에게 조그만 밥 그릇에 ‘쬐깐식’만 밥을 주더란다. 배고파 보이는데 더 달라는 말도 못하고 꼭 그만큼만 먹는걸 보고 안쓰럽고 가슴이 아파 죽겠다 하셨단다.

이런 마음을 가지신 것이 우리 외할머니다. 시커먼 것이야 때 안타는 검은색 옷만 입고 다니기 때문이고, 배를 굶으면서까지 서럽게 공부하기 보다는 일단은 먹고 봤을 나란걸 모르셨나 보다. 이런 외손자를 우리 외할머니는 당신이 자식 기를 때 처럼 배고픈 설움이 가장 큰 것이라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저 한없이 착하기만 해서 말 못하고, 배 곪고 다닐까 염려하신 것이다. 이제서야 할머니 속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어머니가 말씀을 마치시며, 할머니의 소원 중 하나는 내가 들어준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게 마음 아팠었는데, 내가 할머니의 남은 밥그릇을 비웠을 때 그 안타깝고 아팠던 마음이 풀어지셨다고 하신다.

배고픈 시대는 지나갔다고 하지만, 외손자가 배고파 할까 봐 마음의 배고픔을 가지셨던 할머니 셨다.

다행이다. 마음에 품었을 배고픔의 안쓰러움을 적어도 풀고 가신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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