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헤어짐을 가슴 아파하는 건 어쩌면 이기적인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부터 꾸게 되었던 희망, 바람들.
그 사람이 곁에 있어서 한 발씩 한 발씩 걸어 나갈 수 있었던 길들.
어느 날 그 사람과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헤어짐을 고하고 돌아설 때, 이제껏 내가 꾸었던 꿈과 바람들 그리고 길들은 내 눈앞에서 시들어 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게서로에게 아물겠지만, 상처를 남기며 끝나가고 있었다.
잊어버리기 위한 유희를 벌인다. 아직 벌건 태양이 남아 있는 시간부터 술을 마셔됐다. 그저 내 말을 들어줄형을 부른다. 오랜만에 본다며 너스레를 떨어본다. 어디 잘 가는 술집이 없는지 물어보고는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그 사람이 참 싫어하던 버릇인데…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라 가는 곳도 일정하다.뒷골목에 왠지 허스름해보이는 곳을 찾아 들어간다. 금방이라도 천장에서 뭔가 뚝 떨어질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 맨 구석진 테이블에 앉는다. ‘역시 우린 칙칙한 게 어울려’라고 얼굴에 써놓고 다니는 것 같다. 주문도 안 했는데,
소주는 뭘로?
주인아주머니의 예리한 관찰력과 직업정신에 박수를 보낸다. 그사이 술에 쩔은 내 몰골이 저 소주 한 병을 불러냈으리라. 첫 잔에 원샷이 목구멍을 할퀴는 기분이 든다. 입안 가득히 도는 알싸한 향취가 올라온다. 이 한잔에 나는 취할 것 같다. 눈치를 살피던 형이 물어본다. 대답이야 뻔하지만 애써 담아두었던 것을 다시 풀자니 새삼스러워진다. 다시 한잔, 또 한잔 묵묵히 술을 붓기 시작한다.
그 사람이 참 싫어하던 버릇인데…
사는 게 녹록지 않은 듯하다. 아직도 태양이 작열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시름과 불안을 씻어내려고 이곳에 모여들고 있다. 옆 테이블에서 들리는 속 썩이는 자식새끼와 무서운 마누라 이야기는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본인이야 힘들고 슬픈 이야기지만 옆에서 듣는 우리는 꽤 재미있는 시사다큐를 듣는 것 같았다.
다른 누군가에겐 나의 이야기도 한순간의 쓴웃음 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잘해주지 못해서 고생하는걸 잘 알고 있는 듯한데 또 대낮부터 술타령이니 역시나 남자는 철이 안 드는 짐승인가 보다.
2차 행선지는 어디일까? 벌건 얼굴이 창피해서 어쩌지? 뭐 빛깔 좋은 혈색이구만. 갑시다. 마십시다. 이 시간이 지나면 언제 다시 볼까나. 같이 달을 맞이하고 별을 바라봅시다. 까닭 없는 분위기에 젖어 줄줄 나오는 말들이 청산유수라. 진작에 술 안 먹고도 이렇게 재잘재잘 말했으면 그 사람이 그렇게 답답해하지는 않았을 것을…
정신없이 달린 것 같다. 어느새 날은 저물었다. 열기가 사라진 저녁 공기에 술이 깨어온다. 몸은 취해서 비틀거리는데 정신이 맑게 개이는 느낌. 정말 싫다. 비틀거리는 내 모습이 미워진다.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내가 싫어진다.
이런 모습을 많이도 보였는데…
어느새 낯익은 곳이다. 그 사람이 있는 곳에 불이 꺼져 있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자고 있겠지. 가서 추태라도 한번 부려볼까! 술 먹은 김에 ‘니가 나한테 이라믄 안되지’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땡깡을 놓아볼까! 그래도 안되면 한 번만 봐달라고 빌어볼까나. 마음 정리 끝난줄 알았는데 이런 미련은 또 뭔지. 사람 마음이란 건 정말 심장 한가운데 있는 것인가 보다. 심장이, 마음이 이렇게 먼저 요동치는 걸 보면 말이다. 일어서야지. 툭 털어내고. 그렇수 있다면…
평소에 소원했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고 몇 날 며칠을 술자리에서 보내고 나면 이제 만날 친구도 거기서 거기고 마실 술도 거기서 거기다. 멍청하게 누워서 숨만 쉬고 있을 도리밖에 없다. 바보 같다고 해도 상관없다. 원래 바보니까. 오죽 부실했으면 이렇게 헤어짐을 곱씹고 있겠는가. 자리를 펴고 눕는다. 그 사람이 울던 모습이 들어온다. 밉다. 자기야 속 시원하게 울어 버릴 수 있다지만 나는 뭔가. 울고 있던 모습을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초라한 내 모습이 부각될 뿐이다.
나쁜 사람이었다면, 그런 사람 이기라도 했다면...
그 사람이 울었던 만큼 울 수 있을까?
미안하다. 한 번도 제대로 표현해보지 못했던 내 미련함, 무성의함이 그 사람을 많이 아프게 했었다. 정말 나쁜 놈이다. 나란 놈은. 철 지난 어는 유행가 가사처럼 지지리 궁상을 떨고 있는 나는 참 못난 놈이다.
헤어짐이 마음 아픈 이유는 헤어지고 나서야 그 사람을 그리고 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걷는 그 눈동자가 그립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상실의 파편들. 비로소 다가오는 그 사람의 향기, 마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