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기억의 파편들

by 수우미양가


옷 입고 오는 비

고추모종을 옮겨 심던 할머니가 비 한 벌을 흠뻑 입고 나무 밑으로 들어서고 있다.

비는 너무 가벼워서 무럭무럭 마른다. 젖은 새참 즈음을 벗지 않고도 출출한 정오로 갈아입는다.

가랑비는 얇은 제 옷을 고추모종들에게 벗어 입혔다. 시들시들하던 모종들이 비 한 벌씩을 입고 고개를 빳빳이 치켜세웠다.

애벌레처럼 몸을 말고 모종을 심던 할머니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밭고랑을 걸어 나가실 때 흰 실오라기들이 스멀스멀 풀려나왔다.

고추모종과 할머니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 정진규 詩 「옷—알 26」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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