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Reality)는 실제(Practice)에 기반한다.
듀이에 대한 오해의 핵심은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단순한 실생활과 연계된 '실용주의'로 해석하는 견해일 것이다. 이에 따르면, 실용주의는 세속적인 인간의 삶을 영위하고 개선하는 일을 최우선의 관심사로 삼고 있는 '사유체계'라고 판단한다. 즉, 실용주의가 먹고 살아가는 일에 일차적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교육'에 대입함으로써 직업교육이나 노작활동 등과 같은 학생들의 실제 '이익'과 '삶'과 연계된 학습에 대한 강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듀이가 말한 실용주의일까?
프래그머티즘은 전통철학과 구분되는 발상에 근거한다. 전통 철학은 지식을 바깥 세계, 또는 실재(reality)의 표상(表象)이나 모사(模寫)로 간주한다. 지식은 실재를 그대로 표상하는 것이며, 실재와 일치되는 한에서 진리일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철학의 과제는 지식이 실재를 표상하는 방식과 지식이 실재와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을 해명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프래그머티즘은 지식을 바깥 세계의 표상으로 보지 않고, 따라서 세계와 대응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프래그머티즘은 지식을 절대적인 것, 확실한 것,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전통 철학에서 이탈하는 사유 체계다. 이에 따르면, 전통 철학이 추구했던 완성된 최종적인 지식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다. 지식은 언제나 성장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 최종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지식이 도구라는 주장은 세속적인 삶을 위한 도구라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듀이는 교육을 '경험의 계속적인 재구성'으로 정의한다. '경험의 재구성'은 '성장'과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고, 따라서 '교육'은 '성장'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듀이에게 있어 교육에 대한 논의가 의미를 가지는 유일한 기반은 현재 개인의 삶, 즉 개인이 현재의 삶을 위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하는 사태다. 개인이 당장 관심을 가지는 목적 달성하기 위한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파악되는 세계, 또는 실제적 문제 해결이라는 측면에서 파악되는 세계다.
위의 문장을 해석한다면 '사물의 의미'를 그 사용(용도)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경우 '사용'이라는 것은 '언어의 사용'을 말하는 것임에 비하여 듀이의 경우는 그것을 '사물을 사용하는 것'이다. 즉 '실제'(practice)다. (이홍우 역자 서문 중에서)
감히 듀이의 경험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해석해 본다면 개개인의 삶과 연동되어 있는 '기억'이라 말하고 싶다. '인간의 기억은 이전 기억을 통과한다.' 즉, 인간의 경험은 곧 기억을 만들고 그 기억에 따라서 인간의 사고 체계(관념)는 만들어져 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양이'라는 단어를 던진다면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고양이의 모습은 아마 대부분 비슷하지만 동일한 고양이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내가 보았던 고양이, 내가 키웠던 고양이 또는 내가 밥을 주었던 고양이나 내가 물렸던 고양이 등 다 자신의 기억(경험) 속에 고양이를 떠올릴 것이다. 관념의 복합성(assocoation)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의 종류를 사건에 대한 기억인 '일화기억', 사실에 대한 기억인 '의미기억', 해마에 의존하지 않는 장기기억으로 '절차기억'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경험의 재구성(성장)을 통해, 해마에 의존하는 단기기억이 아닌 사회적 맥락(개념)이 반영된 '의미기억', 의미 있는 교육에 대한 기억으로의 장기기억인 '절차기억'을 제공하는 것이 곧 교육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다양성을 가진 개별적 존재이기에 그 개별성을 존중하고, 학교라는 공적인 교육기관을 통해 통제하고 지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닌 개인의 경험(기억)의 재구성과 성장을 이끌어내는 교육을 주장하는 것으로 읽힌다. 단순한 자극에 대한 반응은 교육이 아니다. 학교라는 교육기관은 학생의 '내적 상태'를 인식하고(내적상태를 인식하면 그의 관심과 인식의 대상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의도적인 경험을 제공하여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환경(듀이는 사회적, 물리적 환경을 구분하지 않았다.)과의 접촉을 통해서 인지하게 된다. '마음의 형성', '자아의 형성' 이론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맥락에 따라서 자아라는 개념이 형성된다. (타인의 얼굴을 통해 우리는 감정이 만들어진다. 감정 또한 사회적 맥락에서 이루어진 관념적인 것이다.) 왜 그토록 지금의 교육에서 아동 개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강조하는 것인지 당연하지만 이론적으로 고찰해 볼 수 있다. 전통적 교육에서 강조하는 진리탐구나 교과의 내용, 문명화된 삶의 형식으로의 입문 모두 다 아동(학습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한마디로 '소용없다'는 것이다.
왜 책의 제목이 '민주주의와 교육'인지 감이 온다. 여기에서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론적 활동과 실제적 활동의 구분, 그렇다면 실제적 활동이란 소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직업교육'을 지칭하는가? 듀이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여기에 나타난 실제적 활동은 분명 '직업교육'을 말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교육의 내용이나 성격을 지칭하는 통상적인 의미와는 분명 다르다. '일체의 교육은 직업교육'이라는 말까지 쓰고 있는 듀이의 말에 감정적 뉘앙스를 따라가 보면 그것은 누구나 교육을 받고 난 뒤에는(그 교육의 내용이 어떤지에는 상관없이), 분명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직업에 종사하게 된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교육의 내용(이론적, 실제적)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일부 책의 문장에서 '이론적 활동'에 대비하여 '실제적 활동'이 비하되는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기에 그가 말하는 실제(practice)를 단순히 '직업교육'으로, 단편적으로 해석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모습을 닮은 교육은 그렇기에 분절적이고 공학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 듀이는 철학에서 다루어온 일체의 이원론적 대립을 극복한 '종합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듀이가 극복하려고 한 이원론적 대립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는 것'과 '보는 것', 이론과 실제의 대립이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과 인식을 다룬다는 교육의 행위는 더욱이 그것을 기계적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은 어찌 보면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듀이의 이론에서 파생된 지금의 교육은 어쩌면 듀이가 보면 놀랄 정도로 '교육'을 단순히 공학적이고 목표지향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듀이가 말한 계속성(성장)은 어찌 보면 방향이나 속도를 재단하여 규정지을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다. 무엇을 분명히 해야지만 '실천의 용이성'이 있다고 해서 교육을 공학적으로, 이원론적으로 구분 짓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새겨본다. 그렇다고 디테일한 실천을 무시하고 이론만을 좇는 이상주의자가 되는 것은 더더욱이 경계해야 할 일이다.
*참고도서: 민주주의와 교육(존 듀이 저, 이홍우 역,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