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모습은 어디서 참고할 수 있을까?
"교육이라는 활동은 1)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젊은이(요즘은 평생교육도 강조되고 있지만)들을 훈련하고 가르치는 일 외에도 2) 삶을 위해 재화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일, 3) 치안을 유지하고 질서를 확보하는 일, 4)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일 등 인간이 삶에서 하는 모든 활동이 포함된다."
삶이라는 여러 국면은 사실상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근원적인 질문. 왜 가르치는가?(교육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우리는 더욱이 하지 않는 것 같다. 가르칠 목적과 방향, 의도 등은 이미 국가에 의해 규정되어 있으니까(국가 수준성취기준, 교과서, 국가주도의 입시제도 등)
공교육의 한계와 폐해에 대해 오래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오히려 생산적이고 목표지향점이 분명한 회사나 군대, 기관 등은 이런 철학적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학원과 같은 사교육 시장은 더 집요하게 발전해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학교라는 곳은 정당성과 규범성에 대한 합의는 되어 있지만 실제성과 합리성에 대한 합의에는 도달하기 어려운 전인교육(全人敎育)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욱이 본질에 더 가까운 질문을 던져보고 그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야 한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결국 난항(難航)을 겪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고, 교육 현장에서 표류(漂流)하게 될 교사는 결국 '삶'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는 학생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런 대답이 어려운 문제에 때로 큰 힌트를 제공한다. 사실 선조(先祖)들이 살아온 기록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기록자의 의도와 관점이 녹아들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이고, 더욱이 그것이 권력자의 의해서 쓰이거나 남겨지기를 바란다면 '승자의 역사'로서 포장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역사'로서 교육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역사가의 서술'은 특정한 시대의 있는 삶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의 분야에서 통사(通史)는 그 기원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추정만 가능한 '교육'이라는 활동이 기록되기 시작할 때부터 현재까지의 모습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약점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요약하기도 어려운 수많은 시대와 공간에서 행해졌던 교육활동들, 교육사상가의 이론들, 교육제도나 교육정책들을 살펴봄으로써 인간을 '교육한다'라는 의미와 그 목적을 다시금 돌아보고,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고찰하며, 미래에 대한 준비와 대안을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윌리엄 보이드(William Boyd)의 서양교육사는 충분히 읽어볼 만하다.
서양교육사의 전체 내용을 요약한다면 아마 교육학의 한 분철된 책으로 한 권은 족히 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 표로 정리하여야 할 필요가 있겠다.) 교육사상가들의 다양한 의견들을 읽어가면서 이름도 생소한 사상가들이지만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어 계속해서 책을 다시 앞으로 들추어 보아야 했다. 근대 진보주의 교육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듀이(본인은 진보주의 교육자로 불리기를 거부했었다.)의 이론도 최초도 유일도 아니었고, 그것은 이미 수많은 교육사상가들이 이야기했던 부분을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하여 심리학의 원리를 교육 실제와 관련지은 사실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스펜서(Herbert Spencer)의 '지덕체'교육도 사실은 고대 희랍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최근 '실용주의'교육도 소피스트나 계몽사상에서 그 흔적이 느껴진다. 과연 역사는 시간을 축으로 발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다양한 삶의 양상을 담은 우리의 기록은 그것에 대한 답을 주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그 해답이 가득한 참고서를 멀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세상은 결국 다양한 자아가 함께 살아가면서 이루어져 가는 다원화된 사회이고 형태심리학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합은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따라서 나와 다른 감정이나 기억,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의 대화와 생각의 공유는 무척 필요한 부분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아직도 동양의 농경 공동체적 문화이기도 하겠지만 전체적이고 통일적인 요소가 여러 부분에서 영향을 끼친다. 그것이 우리들의 생각에도 어느덧 영향을 끼치고 결국 자신의 관념을 더 고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직된 사회를 만드는 요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중세의 교육이나 근대 제국주의 시절의 국가주도의 교육 등에서도 배울 점은 있었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번역자(이홍우)의 철학과 글솜씨에 매료되어 그의 책을 편중되게 읽어나가면서 외재적 가치나, 목표지향적 가치에 비해 '내재적 가치'에 대해 더욱 흠모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이홍우 교수도 분명 스스로 그렇게 밝혔다. 교육이라는 활동에 있어서 만큼은 다른 그 어떤 가치보다 '내재적 가치'에 더 우선순위를 둔다고)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류는 이래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나가는 경험(기억)들이 더 확증편향적으로 고착화되어 갈 수 도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