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공학적으로 볼 수 있을까?)
'Dewey(1859-1952)의 배신자들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실제적인 가치(진보주의 교육)와 교과의 가치(전통주의 교육)라는 이분법적인 틀로 재단 지어진 교육의 이념 논쟁에서 듀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진보교육의 선구자로 규정되어 버렸다. 철학자로는 마이너(?)지만 '현대교육학은 듀이 이론의 주석들'이라고 불릴 만큼 교육철학자, 교육사상가로서는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정작 그의 저서들을 제대로 읽고 고찰했던 경험은 기억에 없었다. 실용주의 또는 실증주의로 번역되는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은 단순히 과학적인 실제의 쓰임이나 검증가능한 아이디어, 실생활과 연관된 경험중심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그의 이론이나 철학은 실제 진보주의와 전통주의 교육의 이념 그 둘을 넘어선 제3의 변증법적 가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듀이는 끊임없이 교육 그 자체가 가진 내재적 가치를 강조했었고 교육의 과정이란 계속적인 재조직, 재구성, 변형의 과정이라는 것을 언급했었다. 듀이가 말한 대로 '교육의 과정은 그것 자체가 목적으로서 그것을 넘어선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
'교육'이라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유니크(unique)한 행동으로 문화를 만들고 전수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부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냥이나 집 만들기와 같은 동물들의 본능적 전수와는 그 맥락을 달리한다. 인간의 언어가 출현한 10만 년 전쯤 서로에게 생존에 필요한 다양한 양식을 구체적으로 그림과 언어, 시범 등을 통해 전달했을 것이며 그것을 실제 훈련하고 실천하는 등의 구체적인 행위로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문자가 출현한 후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교육은 이루어질 수 있었고 그것은 인간의 상태를 변화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 문장에서는 미성숙한 아동을 '문명화된 삶의 형식'으로 입문시키는 과정으로써 교육을 '성인식'에 비유한 R. S. Peters(1919-2011)가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이 문명화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삶의 형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고, 이러한 형식을 체계화한 것이 바로 지식이라는 것이다. '문명'이라는 용어에는 '기술적 개념'이 들어가기에 자칫 교육을 수단으로 바라보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피터스는 철저하게 교과중심의 전통주의적 교육철학자였다. 즉 인간들이 체계화하여 만든 전통적 교과의 가치를 존중하고 이 교과를 통해서 인간의 지력(知力, inteligence)은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력은 듀이에 의해서도 강조되는 개념이다. 지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다양한 문제 사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이다. 공학적으로 마음에도 근육이 존재한다는 소위 심근(心筋)의 발달을 주장한 '형식도야설'이 부정되더라도 인간의 지력은 누구나가 인정하고 존재가능한 인간의 능력 중 하나다. 이것은 하나의 문제 사태 속에서 신장되며 이와는 다른 문제 사태 속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는데 해결된다. 이처럼 문제 사태를 해결하는 가운데 지력이 신장되는 과정이 듀이가 말하는 경험의 재구성이요, 성장이며, 이것이 곧 교육의 과정이라고 피력한다.
어쩌면 교육의 과정에서 브루너(Bruner, 1915-2016)가 핵심적으로 이야기 한 나선형 교육과정이 연상되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세 학자의 굵직한 이론은 어쩌면 그 가치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국면에서는 연결되고 관련성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단순한 전통적 지식의 전수와 전달이 아닌 탐구활동을 통한 문제해결의 경험은 다른 주제 또는 다른 교과의 문제해결에도 전이가 되고 그러한 경험의 축적은 인간의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은 듀이가 말한 경험과 맥락이 같으니 말이다. 교과(내용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피터스의 이론도 마찬가지다. 결국 공부, 학습이라는 것을 단순하게 언어학으로만 본다면 이름을 아는 것, 단순하게 우리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물과 현상, 실체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하나의 개념적 이해는 다른 개념으로 전이될 수 있고, 하나의 방법적 탐구의 경험은 다른 영역의 탐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실천적인 면에서는 원칙적이고 엄정한 규칙과 규율이 따라야 하고 그 표준적 교육과정이 분명 존재해야 하지만 그것이 최근 우리 세계를 휩쓸고 있는 자본과 경제, 정치 등의 논리 아래 자리 잡게 될 수는 없다. 교육은 물리적이면서도 화학적이고 생물학적이면서도 역사적인 통섭적 요소가 강한 유기체이므로 이것을 당장의 목격이 가능한 단기적인 성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육을 과학으로 만들라'는 요청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본질적으로 애매성을 가진 교육의 기본 성질을 억지로 변형시킨다는 것은 모순이다. 교육이라는 복합적이고 예술에 가까운 인간의 행위를 자극과 반응의 행동주의적 모형으로 간주하거나, 어떤 종류의 폐쇄적 인과체계로 간주하는 것은 엄청나게 이 실천 자체를 오해하는 것이고, 과학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현 지구를 살고 있는 종은 유일하게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자아(self)라는 현대 과학으로도 설명이 불가한 특이점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인간을 다루고, 성장시키며, 궁극적으로는 의도를 가진 바람직한 변화를 이르게 하는 '교육'이라는 행위를 설명할 때 근시안적인 요소로 입출력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교육이 백년지대계'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현시대에서 이 말은 점점 사장화되어 가고 있다. '교육'이라는 우리 고유의 가장 이상적이고 본질적인 행위에 대해 듀이의 성장과 경험이라는 키워드로 우리는 천천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