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성인식이다.)
R.S.Peters(1919-2011, 리처드 스탠리 피터스)는 분석철학자로 교육에 대한 이론적 질문(어떻게 되어 있는가?)과 실제적 질문(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사유하고 답을 찾고 있다.
삶이란 복잡성과 애매성을 내포하고 있어 삶의 모습을 담고 있는 '교육' 또한 분명하게 규정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에포케(Epoche) 즉, 판단중지해야 한다는 말처럼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고 그 범주안에 속해 있는 수많은 개념들에 대해 '설왕설래'의 난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번역자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생각, 고민이라 단순히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고민(헤겔은 철학적 사고를 일상적인 사고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라고 했다.)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단순히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너무 많은 것들이 존재하니까.
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을 받는 사람에게 '왜 배우는데?라고 묻는다면 아마 '잘 살기 위해'라는 맥락의 답을 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잘 산다는 의미 자체가 사람마다 다르게 설정되어 있고 이것은 규정지을 수 있는 복잡성과 애매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수많은 단어들도 마찬가지다. 분석철학자답게 평등, 윤리, 규범 등 사회학적 맥락에서 쓰이는 단어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에 '교육의 개념'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가. '교육'은 가치 있는 일을 전달함으로써 그것에 헌신하는 사람을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규범적 기준>
나. '교육'은 지식과 이해, 그리고 폭넓은 지적 안목을 길러 주는 일이며, 이런 것들은 '무기력한'것이어서는 안 된다. <인지적 기준>
다. '교육'은 교육받은 사람의 의식과 자발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몇 가지 전달 과정은 교육의 과정으로 용납될 수 없다. <과정적 기준>
규범적 기준은 내재적 가치로의 교육을 규정한다. 두 번째 인지적 준거는 규범적 준거의 구체적 내용을 밝히는 것으로 인지적 안목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과정적 기준은 학습자의 의지와 자발성을 전제로 도덕적으로 온당한 방식으로의 교육이라 설명할 수 있다.
피터스는 '성년식으로서의 교육(입문의 과정)'을 주장했다. 문명화된 삶의 형식(=지식의 형식)이란 곧 '교과'이며 이것은 인간들의 경험의 상이한 측면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적 언어이다. 인간은 그 말에 내포된 세계를 파악하는 수단으로써의 개념구조를 배운다. 공적 개념구조와 공적 기준을 특징으로 하는 '지식의 형식'은 이 점에서 공적 언어를 매개로 하여 끊임없이 다음 세대로 전수되는 공적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지식의 형식'에 입문되지 않은 경우는 인간은 그들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경험이나 현상을 의미 있게 해석할 수 없다. 우리는 결국 '지식의 형식'에 의해 규정되는 그러한 삶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분석학적 해석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그 언어 속에 담긴 의미를 해석하고 구분하여 사고를 정교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만 너무나도 집요하다고나 할까? 우리 인간은 결국 '범주화된 개념'속에서 살고 있다. 언어가 바로 그 개념을 만들고 언어를 통해서 모든 것을 상상하고 해석하고 추리하고 유추하고 예견하고... (즉 세상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만든 '형식'이다. 그 규정된 개념을 전수하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교육, 바로 '성년식'으로서의 교육이다.
'결국 모든 학문은 언어학이다.'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말에 대해 조금씩 설득이 되어간다. 눈과 오감으로 인식한 세상(이미지적 기억), 하지만 문자와 언어로 인식한 세상(언어적 기억) 이것이 기호와 수식(상징적 기억)으로 나아간다. 보다 고차원적 사고를 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서호주 사막에서 만난 어보리진에게 '추석'을 이야기하면 그 개념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브라질이나 몽골의 국민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교육을 받지 않은 자와의 차이도 있겠지만 맥락의 차이는 더 크다. '누구에게서 태어났냐?' '어디서 태어났냐?'는 더 중요한 문제다.
이러다 보니 교육의 '내재적 가치'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외재적 목적으로 인한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로 까지 주장한다. 교육은 삶의 형식을 그대로 닮아 있기에 도구화될 수 없다는 것으로 읽힌다. 어떤 경우라도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교육의 내재적 가치에 대한 장은 정말 설득이 되고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다. 물론 내재적 정당화와 도덕으로 온당한 방법, 가치 있는 것의 전수 등 합리적 이성에 바탕한 교육을 주장하면서 교육과 삶의 연계 가능성을 멀어지게 했다는 비판도 있다. 지나치게 엄격하고 보수적이며 주지적이고 남성적인 그의 학문적 행보를 지적하기도 한다. 특히 국가주의가 득세하던 시절 인류의 문화유산 전수에 비중을 둔 그의 지식관은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경험중심 교육과 비교해 보면서 교과의 내재적 가치와 선험적 정당성을 강조하는 본 책은 분명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