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자들이 저지른 부도덕한 행위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사회에 더 큰 충격을 가한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석, 박사 학위까지 가진 사회 인사들이 수갑을 차는 모습은 이제 식상하지도 않지만, 대중들에게 '어찌 저 지위에 있는 자가 저런 일을?...'이라는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것은 여전하다.
이와 같은 현실은 교과로서의 '도덕과 무용론'에 더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배우면 뭐 하니? 배운 놈들이 더 한데.'
따라서 삶에서의 도덕교육, 실천을 위한 도덕교육이 강조되고 있다. 교육에 대해 삶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것은 비단 도덕과 뿐만이 아니다. 이것이 맞는지, 저것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인간의 내면에 마음이라는 것은 분명 한 영역이 일으킨 작용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음은 부분의 합이 아닌 삶의 총체(總體)로서 이루어진 정말로 독특한 그 무엇이다.
학교에서는 도덕교육보다 인성교육이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인성을 'personality'로 해석한다면 타고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서양적 사고다. 이와 달리 동양에서는 갈고닦아 이상적인 형태로 맞추어 나가는(和) 것으로 본다. 때문에 '도(道)를 닦는다.'라는 말은 아주 알맞은 관용표현이다.
동양적 사고로 본다면 인성교육보다는 도덕교육이 보다 적확한 표현이겠다. 타고난 인성을 바람직한(?) 측면으로 끌어올리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의 의도니까.
물론 교과를 통한 도덕교육이 아무리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행동으로 연결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로서의 도덕은 행동으로 실천되리라는 기대 속에서 가르쳐진다. 요약하자면, 우리의 앎은 마음을 형성할 것이며, 그 마음은 행동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의도로 도덕은 교과로 가르쳐진다고 볼 수 있다.
'지력이 곧 덕이다!'
라는 말을 대변해 주듯 우리는 도덕을 교과의 내용으로 배운다. 실제 지식은 '실천동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나니...'라는 말도 곧 지식이 행위로 이어진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그러고 보면 '마음을 먹는다'라는 말은 참 이상하다. '먹을 것이 없어 마음을 먹는다'라 어원을 설명하지만 마음을 먹는 것은 행동으로 이어지는데 가장 큰 동력(실천동기)이 된다. 즉, 우리의 의식적 행위는 '마음을 먹었을 때'가 가장 구체성을 발휘한다. 그런 마음을 먹게 하기 위해 우리는 배우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태극기 부대와 응원봉으로 진화한 촛불이라는 행위는 어떤 마음먹기가 작동한 것일까?
(군대 용어가 여전히 난립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태극기 부대'는 통용되는 가장 일반적인 명사다.)
인간은 기억에 구속된 존재다. 기계론적 전제일 수 있지만 '기억'이라는 것이 '의식'의 근원이기에 반박의 여지가 없는 명제로 볼 수 있다.
6.25라는 역사적 비극을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은 의식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7-8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급속도로 성장한 경제성장은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대의(?)를 위한 민주주의의 후퇴는 필요조건이라는 신념이 형성되었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저녁시간이 임박하면 사라져 버리는 태극기 부대와 엄동설한에도 키세스가 되어 목적 달성을 위해 신념을 표출하는 행위는 어떻게 구분 지어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구성원들의 연령대의 많고 적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 나이가 들었다 해서 더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할 법도 없으니까 말이다. 노익장(老益壯)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사회적으로는 오히려 더 바쁜 일상을 지낼 가능성이 큰 응원봉 부대다.
우리 행동의 동기가 되는 '마음먹기'는 역사를 보더라도 명확해진다. 파시즘이나 군국주의, 국가에 의한 강력한 통제는 개인의 자율성과 자발성을 강조하는 민주주의보다 한계가 분명했다.
아니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더 많았다.
국민이 계몽되어 인간의 존엄성이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이 되는 지금 우리는 굳이 '자유'라는 말을 앞에 붙이지 않아도 배우고 익혀서 알고 있다.
늘 그렇듯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 천부인권(天賦人權), 사인여천(天賦人權)은 당연한 가치다.
그러고 보면 교과서 속에 끊임없이 남기고자 하는 뉴라이트, 극우주의자들의 '자유'는 배운자들이 법을 이용할 '자유', 본질과 규범이 존재한다고 믿는 도덕에 대한 판단의 '자유'를 말하는 것 같다.
정리하자면 그 어떤 외재적 동기도 내재적 동기를 쉽게 이기지 못한다. 배우면 마음먹기가 더 강화된다. 마음을 먹으면 행위로 이어질 가능성은 더 커진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교과를 배우는 것이다.
물론 교과를 교과답게 배워야 하겠다.
그렇다면 도덕과를 도덕과 답게 배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다음기회에 풀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