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gal May 01. 2020

꼼꼼함에 대하여

있으면 좋겠으나 가지진 못했고 기르고 싶은 의지도 크게 없어 더 문제인

꼼꼼한 편은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여러 종류의 근거가 있다. 먼저 여행하면서 소지품을 잃어버린 경우가 3번 있고, 이 3번은 고가인 경우만 해당한다. 엄마 말에 따르면 손이 야무지지 못해서, 내가 칼질을 하거나 그릇을 들 때 너무 불안하다고 한다. 꼼꼼하지 못한 데는 proof-reading을 싫어하는 성격도 한 몫을 한다. 내가 쓰는 글을 써내려가면서 이미 그 글에 질리는 경우가 많아 다시 읽는 수고로움을 별로 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래서 오타도 많고 비문들이 많다. 사실 외국어로 생활하면서 이 버릇이 좀 나아졌지만, 외국어는 나에게 꼼꼼하지 못함 플러스 근본적으로 불완전함까지 드러내는 바람에 더욱 슬퍼지는 영역이다. 업무를 할 때도 꼼꼼하지 못함은 돋보였다. 신입사원일 때 여자 팀원하고 일해본 적이 없는 딸만 있는 팀장님이 어떻게 피드백을 줘야 하는지 몰라 고생하던 시기에, 기안 오타가 많았던 나에게 제대로 된 피드백 대신 "디테일"과 관련된 책을 선물했던 경험도 있다. 그리고 패기가 넘쳤던 나는, "저는 숲을 보는 스타일인데요" 같은 멍멍이 소리를 대답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저 소리를 하면서 잘하는 분야가 있었어서 다행이지, 지금 내가 그런 팀원을 데리고 일해야 한다면 일찌감치 손 떼고 난 쟤랑 일 못한다고 말했을 것 같다. 아참, 그리고 뜨개질 같은 취미를 절대 못 두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겠다. 


이렇게 적으면서 보니 나에게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1) 꼼꼼한 성격이 아니다. 2) 개선에의 의지가 약하다. 첫번째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 다르니깐. 하지만 진짜 문제는 2)번이다. 완벽한 사람이 아닌지라 여기저기 더 낫게 만들고 싶은 분야가 많다. 하지만 꼼꼼함은 그 중에서 항상 낮은 우선순위를 차지한다. 사실 꼼꼼함의 영역은 재미의 영역이 아니다. 글을 쓸 때를 생각해보자. 생각을 막 써내려가고 정리하고 표현해내는 과정은 너무 설레고 신나지만, 그걸 읽고 다듬고 흔히 말하는 엔지니어링하는 과정은 흠... 적어도 신이 나는 영역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재미만 보면서 살았나. 


예전엔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내것이 아닌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다른 걸 더 잘하자. 그리고 우선 재미있는 걸 먼저 한 다음 나중에 생각하자. 우선순위에서 꼼꼼함을 미뤄두었다. (확실히 해두자면, 그렇다고 아주 부실한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다. polish하는 과정을 좀 생략해두었다고 하자.) 하지만 나도 이제 연차와 나이가 저절로 늘어나고 좋은 결과물을 보는 눈이 더 나아지면서, 별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저 "마지막 터치" 같은 꼼꼼함이 생각보다 중요한 과정이라는 걸 배워간다. 그리고 이게 내가 성과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이 성실하고 근성있는 사람들이 가진 좋은 무기라는 것도 같이. 


대충대충 살아도 살아지던, 운 좋고 혜택 많이 누리던 시기를 지나서, 이제는 심은 게 없으면 거두어들일 게 없을지도 모르는 시기로 들어가는 입구. 꼼꼼해져보자 하고 다짐하면서 액션 플랜으로 적어놓은 건 다음과 같다. 1) 메모를 생활화하자. 2) 좋은 문장을 쓰기 위해 문장을 공부하자. 3) 긴 호흡의 글을 읽고 쓰는 연습을 하자. 4) 일상적인 일들도 열심히 하자 (예를 들면, 청소 같은 것들). 5) 좋아하는 책을 읽을 땐 소리내어도 읽어보자. 이 항목들은 결국 사소함의 bar를 더 낮게 만드는 노력들. 좀더 가까이서 들여보기 위한 시도들.


그래서 내가 하는 작은 노력과 시도들은 대충 이렇다. 내가 앉아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곳곳에 펜과 메모지를 두었고, to do list에 사소한 목록도 적기 시작했으며 (오늘은 마스크팩하는 날! 이런 거), 장보러 갈 때는 적어놓은 쇼핑아이템을 적극 활용한다. 몇몇 문장을 위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가 그 중 하나. 메모를 잘하는 법도 검색해보고 이런 저런 앱들도 봤는데, 결국 Pages, Reminder 같은 기본 앱들이면 충분하고, 집에 남아도는 메모지와 학생 때 이미 다 썼어야 했던 펜들이 오히려 더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필사를 하는 분을 보니 이것도 좋겠다 싶어서 평소에 말과 글이 참 맘에 들었던 한 저널리스트의 책을 주문했다. 먼지들과 머리카락들이 보일 때 10번 중 9번은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한번은 꼭 먼지를 털어내고 청소기를 곧장 돌리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길다기보다는 구구절절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내가 꼼꼼함을 뒷전에 두었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곰곰이/곰곰히를 검색해보고 곰곰이로 바꾸는 이런 노력?),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었다. 세세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 내가 그 곳에 있었지 하는 것만 남은 여행지,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했던 수많은 요리들, 끝내고 잊어버리고 싶었던 집안일들, 쓸데없음 딱지를 붙여두었던 "알고보면 중요한" 단계들이 그렇다. 거북목처럼 쉽게 교정하기 힘든 습관이겠지만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그나마도 힘들 것 같아 이렇게 베이비 스텝을 시작한다, 다짐이라기보다는 반성에 가까운 이 꼼꼼함에 대한 이야기로. 





매거진의 이전글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처하는 자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