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장마
예전에 같은 직장 바로 옆팀에 있던 동기가 유난스러운 팀장 밑에서 너무 고생을 했다. 하긴, 그 동기가 흔히 말하는 개복치기도 했다. 그때 남의 일이라고 편하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던 것이 기억난다. "그냥 지금 이 상황을 비가 오는 거라고 생각해봐. 비가 오면 어떻게 하지? 그냥 우산을 쓰고 나가거나, 우산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비를 맞겠지. 근데 어떡해.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위기가 닥치거나 힘든 상황이 다가올 때, 항상 이 질문을 먼저 한다: 비는 뭐고 우산은 뭔가. 일종의 코드명인 셈. 비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우산은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무엇. 코로나바이러스는 누가 봐도 비다. 그냥 비가 아니고 폭우다. 강이 범람하고 뚝이 무너지는 정도의 강한 비다. 사람들은 집에서 일하고 먹고 놀며, 더이상 허그하며 인사하지 않고, 저 멀리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어떡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굉장한 무력감을 느낀다. 하지만 인정하자마자 자유로워지는 아이러니. 딱히 우산을 마련할 필요 없이, 이 시기는 피해가면 되는구나 하는 깨달음.
태어난 후 기억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삶이 여유롭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샤워를 하고 정성스럽게 커피를 준비해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고, 일하듯 공부하고, 뭐 먹을지 고민하고 준비해서 식사를 하고, 적당한 신체활동을 하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나른한 기분에 잠자리에 들고, 그리고 반복.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마치 원래 내것이었던 것처럼 착 내 삶에 달라붙은 건, 아마도 조용한 내 공간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덕이 크다.
걱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쑥 튀어나오는 이런 생각들을 감당할 튼튼한 일상이 있어주어 좋다. 내 가장 튼튼한 우산이랄까. 지금이 6월말 장마 같은데, 이 또한 지나가겠지 싶어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시간이 말해줄 것들, 그안에서 난 무얼 배웠고 얼마나 성장했을까 기대해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