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에 시작해서 5.18까지 이어진 선생님에 대한 기억
배우는 걸 좋아한다기보다 "배우는 나"라는 상태를 좋아한다. 아니다, 그렇다는 걸 최근에 배웠다. 학생이라는 상태가 주는 그 편안함을 좋아한다. 틀려도 되고 몰라도 되는, 하지만 뭐라도 얻어가고자 무언가를 하는 그 상태. 그러다 보니 정규 교과과정 외에도 이런 저런 걸 많이 배웠고 이런 저런 가르침들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부터는 그 짤막한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
1. 몬테 크리스토
초등학교 2학년 때, 첫 남자 담임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그 당시 40대였던 것 같고, 목소리가 참 좋았었다. 이 선생님이 기억나는 건 수업이 끝날 때 자투리 시간마다 몬테크리스토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주셔서다. 슬프게 그때 배웠던 게 특별히 기억에 나지 않는데, 교단에 서있던 선생님과 함께 절벽에 있는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 아직도 너무 선명하다. 나중에 커서 이 책을 읽어보려고 폈는데, 몇 장을 읽다가 그때 자투리 시간만큼 몰입감이 없어서 덮었고, 어느 순간 베니건스 메뉴가 더 먼저 생각나는 그런 슬픈 어른이 되었다. 한가한 요즘,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2. 넌 참 계산적이구나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 분단별로 돌아가면서 청소를 했는데, 1분단과 2분단이 이미 청소를 마친 상태에서 3,4분단이 남아있는 날이었다. 그런데 빨간 날이었는지 학기 말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당신이 생각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1,2분단이 한 걸 없는 셈치고 처음부터 다시 순서를 돌리자는 거다. 지금이고 그때고 억울한 것 만큼이나 청소하는 걸 매우 싫어해서, "선생님, 그럼 1,2분단이 이미 청소한 게 억울하니깐 3,4분단까지 순번을 돌리고 다시 정하는 게 좋겠어요"라고 제안했다가, "넌 왜 이렇게 계산적이니?"하고 짜증을 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4학년이 계산적이었다면 굉장히 특수한 재능이었을텐데, 저 짜증내던 선생님 얼굴이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니 상처는 상처였나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계산적인 나를 굉장히 좋아하고, 계산적인 이 성향을 십분 발휘해 숫자와 분석으로 먹고 사는 데이터 분석가가 되었다.
3. 화려한 장미보다 은은한 백합을 닮은 아이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열심히 다녔었는데, 해마다 새로운 교회선생님들이 생기는 게 좋았다. 지금의 나보다 어렸던 한 여선생님이 크리스마스 선물과 함께 적어줬던 저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난다. 꽃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던 초등학생이었는데, 이 편지 이후로 백합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어떤 점이 화려한 장미보다 은은한 백합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저 말 때문에 은은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다.
4. "애들끼리 그럴 수도 있지"는 어디까지 허용될까
지금도 크지만 중2때는 웬만한 남자애들보다 키가 컸다. 마침 짝꿍은 그 중에도 작은 남자애였고, 장난기가 많았다. 그때 쉬는 시간마다 그 친구랑 했던 게임이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진 사람 따귀를 때리는 거였다. 나도 왜 그러고 놀았는지 모르겠는데, 중2였다고 변명을 해보지만 어떻게도 좋게는 포장을 못시키겠네. 반성합니다... 아무튼 쉬는 시간에 마침 내가 두번을 연속으로 이겼고, 마침 때리는 기술도 굉장히 좋아져서 그 친구 얼굴에 빨간 자국이 남았다. 그때 담임선생님은 또 유난히 키가 작은 여선생님이었는데, 아무래도 그 남자애한테 감정이입을 했는지 "너처럼 큰 애가 이렇게 작은 애를 괴롭히면 어떡하니?"하고 게임을 한 걸 혼내지 않고 나를 그 친구를 때린 나쁜 키 큰 애로 만들어버렸다. 그 뒤로 나는 남자 때리는 여자애가 되었고, 그 남자애는 여자한테 맞은 부끄러운 애가 되었다. 그 뒤로 한참을 키 작은 사람하고는 안 어울리게 되었다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작고 야무진 친구들과 함께 놀면서 키를 극복했다. 아참, 그 뒤로 그 누구의 따귀도 때려본 적이 없다.
5. 민주화운동 때 선생님은...
대학생들이 시위를 많이 하던 시절, 시위를 참 많이 하던 대학교를 다니던 작문 선생님이 한번은 그 시절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표정이 많지 않은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하루는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시위하러 나가지 않았던 자신을 후회한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뭐가 뭔지 모르고 그 복잡했던 얼굴만 기억이 났다가, 근현대사를 알아가면서 저런 개인들과 앞에 나섰던 개인들, 그리고 방해했던 개인들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가 결국 누군가의 기억과 기록이라는 게 아주 조금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6. 나도 쉬고 싶다
몸이 굉장히 건강한 편. 그래도 가끔 조퇴든 결석이든 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 딱 두 번 아주 심하게 그 욕구가 생겼다. 첫번째는 눈병이 유행할 때였던 것 같다. 눈에 렌스세척액을 넣으면 눈이 빨개지고 눈병처럼 보인다고 해서 친구들과 다같이 했던 기억. 그런데 그리고 나서 아이라인을 열심히 그려서 선생님이 "하나만 해, 눈병이야 화장이야"해서 다 수포로 돌아갔던 기억. 같은 해 전학간 다른 학교에서는 독감 연기에 도전. 우선 입술에 파우더 칠을 해서 창백하게 만들고 나서 담요를 오래 덮고 있어 얼굴이 빨개지게 만들었다. 바로 옆 교무실로 담요를 덮고 가서는 "아무래도 몸살에 걸린 거 같아요. 집에 가야겠어요."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웃으며 "우선 담요 저리 치우고 세수를 하면 괜찮아질거야. 그리고 나서도 아프면 다시 와."라고 대처하셨다. 연기자나 무대분장하는 사람이 안 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도 연기는 포기를 못하고, 바로 다음 해 방학 오전 수업에 착출되어 나가던 시기에 한번 더 시도를 했다. 엄마가 마침 집에 없었고 언니랑 동생이 집에 있는 게 너무 부러워서 나도 학교를 안 갔다. 그때 학생부장 선생님이 전화가 왔는데, 눈치없이 내가 받은 것. 순발력도 별로였는데 발연기는 더 별로였다. "지금 우리 아이가 몸이 안 좋아서 집에서 쉬고 있어요"하고 엄마인 척을 했다. 전화기 너머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리고 "어머님 목소리가 많이 어리신데요?"하고 선생님이 물었고, "네,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호호"하고 대답을 했다. 잠시 헷갈리는 듯 하고 전화는 대충 끝났고, 옆에는 웃겨 죽으려고 하는 언니와 동생이 있었고 흑역사가 그렇게 하나 더 늘었다. 다행히 학생부장 선생님은 일이 많으셨던 것 같다. 이 전화에 대해 다시 묻지 않았고, 나도 이 선생님이 보이는 것 같으면 복도로 나가지 않았다. 수많은 선생님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 거짓말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으실텐데, 다들 고생이 정말 많으십니다.
7. 오늘 파전은 내가 쏜다!
반 분위기라는 게 참 중요한데, 내 고3 반은 그런 점에서 분위기가 참 별로였다. 담임선생님은 인기가 많은 편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 반대였는데, 사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하루는 축제날이었고, 선생님이 기분이 좋았는지 "오늘 파전은 내가 쏜다"라며 기분을 냈는데, 아무도 와!하는 소리 없이 30초 동안의 정적. 그때의 무안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선생님은 정말 힘든 직업이고, 고3은 참 힘든 사람들이다.
8. 글쓰기 선생님
대학교에서 제일 좋았던 건 읽고 쓰는 시간이 많았던 1학년의 교양수업들. 학술적 글쓰기 시간에 만난 한 선생님은 독일어 전공을 한 시인이셨다. 글을 써 제출하고 나면 따로 시간을 내서 일대일 피드백을 주셨는데, 그때 해주셨던 피드백이 아직도 기억에 난다. 글의 형식만 봐주신 게 아니라 글 속에 있는 나의 모습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해주셨다. 내 글을 좋아해주셨고,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보완하는 점을 많이 칭찬해주셨다. 내가 글쓰는 게 두렵지 않고 피드백을 받는 걸 좋아하는 건, 아마도 이때의 긍정적인 경험 때문일 것이다. 기회가 되면 한번 더 뵙고 싶은 선생님.
9. 나도 선생님
대학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6-7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선생님 봉사를 매주 8년간 했었는데, 어렸을 때 받았던 따뜻함을 전해주고 싶어서 나름 최선을 다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어린이들로부터 배운 게 사실 더 많아서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부끄럽다. 선생님 발음도 제대로 못하는 귀여운 어린이들이 생각난다. 애들이 너무 말이 많아 힘들 때, "우리 말 안하기 시합할까?"하고 제안하면 눈을 반짝이며 입을 꼭 다물었던 그 귀여운 친구들. 나는 어린이들이 참 좋고, 그 순수함이 너~무 사랑스럽다. 진심은 통한다,는 내 가치관이 확고해진 것도 바로 이 아이들 덕분. 역시 어른이 문제야.
10. 친구가 된 나의 선생님들
사교육을 거의 안 받고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나도 벌이가 생기고 배우는 게 귀찮아지기 시작할 무렵, 적극적인 사교육을 시작했다. 아니, after work 활동에 돈을 쓰기 시작했다고 해야겠다. 우선 제일 먼저 시작한 건, 스페인어. 직장생활이 지루해 시작했는데, 갔더니 나같은 직장인들 셋이 앉아있었다. 동기라고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밖에 없는, 열심이 없는 직장인들. 마침 선생님도 우리 정도 나이였고 여행을 좋아하던 사람들이어서 사적으로 친해졌다. 나중에 이직을 하고 같은 건물에서 일하면서 다시 만난 건 재미있는 인연. 그리고 유학을 준비하면서 영어로 말하는 환경에 좀더 노출되고자 직장인 회화반을 다니면서 만난 선생님과도 친해져서, 런던에 갈 때마다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소수자 인권, 페미니즘,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선생님이자 친구라 여러모로 이야기하는 게 즐겁다. 독일어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룹 수업을 들었는데, 이 선생님은 문학을 전공하고 좋아하는 친구라 서로 문화 콘텐츠 추천을 하며 와인을 마시며 친해졌다. 내 독일어는 안 늘었지만, 좋은 친구가 생겼다. 아참, 스페인어도 음식 이름이나 겨우 아는 정도고, 영어는 그냥 먹고 사는 정도로 하는데 사실 그 수업이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다.
이 밖에도 여러 선생님이 생각났다가 사라진다. 불편했다가 그리워진다. 학습력이 좋았던 학생이라 나 정도면 좋은 학생이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많은 선생님을 귀찮고 어렵게 만들었던 학생이었던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든다. 배우는 것도 쉬지 않을테지만, 어느 시기가 되면 배운 걸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선생님까지는 아니어도 말이다. 나를 가르친 수많은 선생님들, 그리고 어쩌다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내 반면교사가 되어준 분들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