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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al Nov 01. 2020

라그나르 / Ragnar Lodbrok

역사드라마 바이킹즈를 보고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고 그 기록된 시기의 관점이라서 누가 언제 어디서 들여보느냐에 따라 같은 이야기도 한쪽에서는 희극, 다른 한쪽에서는 비극일 수 있다. 종횡으로 다양할 수 있는 해석들이 아마도 역사에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점인 듯 하다. 나는 흔히들 말하는 역사덕후가 전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과 문화와 현재를 이해하는 데 역사만큼 좋은 도구가 없다는 점을 깨닫고 뒤늦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역사 비기너다. 그러던 중, 북유럽의 문화에 대해 궁금해졌고 이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바이킹의 시각에서 본 바이킹 시대(793–1066 AD)를 보여주는 <바이킹즈>는, Saga라고 하는 구전된 이야기와 침략당한 나라들의 기록들을 재구성한 역사 드라마다. 내가 배워온 한국사가 침략의 역사이기보다는 침략으로부터 지켜내왔던 역사였어서,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새로웠다. 


드라마 줄거리 설명은 나보다 위키피디아가 더 잘하니까 스킵하고,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 라그나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우선 간략하게 평부터 하고 시작하자면, 어머 세상에, 내가 이렇게 너무 이해하겠는 캐릭터를 만난 게 오랜만이었다. 그가 왕이어서도 아니고 위대하거나 완벽해서도 아니다. 그가 가진 호기심이라는 동력, 쉬이 새로운 것에 빠지고 쉽게 질리고 마는 그 패턴이 너무도 내것 같아서였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아주 거대한 야심과 포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평온하게 먹고 살 수 있었던 비옥한 토지가 목표였던 한 사람이 걸어간 길이 한 민족의 거대한 모험이 되었다니. 물론, 그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고 타임머신이 생기지 않는 한 확인도 불가하다. 하지만 왜 작가가 라그나르를 이 여정을 이끈 사람으로 설정했는지는 너무도 잘 알겠다. 바이킹들을 단순히 호전적이고 잔혹하고 잘 싸웠던 괴물같은 민족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길을 개척해서 나섰던 또 다른 사람들로 그려나가기 위한 장치였을 거다. 그는 농부였고 마지막 순간에도 비옥한 토지에서 자기 가족이 살아갈 안락한 삶을 바랐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장점은, 문화와 그 당시 문화의 큰 부분이었던 종교가 서로 대화하며 차이를 이해해가는 과정을 단편적인 등장인물들의 대화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당시 영국 한 지역의 왕과 라그나르가 사후세계에 대해 서로 대화하는 장면, 발할라와 천국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 같은 점이다. 알고 보면 사람사는 건 크게 다르지 않은데, 어떤 환경과 과정이 한 인간 내에 있느냐에 따라 엄청 다른 행동과 결과를 낳는다. 

https://youtu.be/n3cimQ6yIT8

기독교적 세계관의 천국과 바이킹의 발할라에 대해 두 리더가 나누는 대화


역사니깐 주인공도 사람이면 죽는 게 당연하니 스포일러는 아니겠지 싶어 말하자면, 그 거침없었던 라그나르는 자신의 호기심이 결국 독이 되어 서서히 약해지고, 권력을 원했던 적이 없었지만 그 힘을 지키는 방식으로 누구보다 왕답게 마지막을 맞이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도 교훈이라면 교훈이려나. 아니면, 호기심으로 흥한 자 호기심으로 망한다가 더 적절하려나.  


다큐로 보면, 엥... 하게 되는 순간이 많겠지만, 기록이 거의 없는 역사의 파편들로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낸 걸 생각하면 진짜 대단. 어떤 순간에 역사의 어떤 부분을 꺼내드느냐가 현대의 사극 작가들이 가진 힘이라고 한다면, 다양성이나 민족주의에 대해 논의가 활발한 지금의 시대에 침략자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 힘의 좋은 예가 아닌가 싶다.  

 

서로 다른 삶과 문화가 만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것들이 탄생해나가면서 어느 방향으로 확산되어가는 걸 깊숙이 들여다보면, 남들보다 모호한 경계와 낮은 담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누구보다 쉽게 물들고 어느 새 휘발해버리는 그런 성향의 사람들. 아직은 어떻게 써먹을지 몰라 여러모로 경험을 안으로 꼭꼭 챙겨두고 있지만 언젠간 나도 좋은 방식으로 이를 사용할 수 있다면 너무 기쁠 것 같다. 




같이 도끼와 칼을 들고 방패로 막아가며 싸우는 멋진 여성들도 볼 수 있는, 허나 결국은 남자들이 그린 드라마, 바이킹즈. 7월에 적었다가 내버려둔 이야기인데, 가을에 보려니 먹을 것 없이 황량한 북쪽의 추위가 제법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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