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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al Oct 24. 2020

적응기와 작은 교훈들

많은 실수를 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곳에서 시간을 보낸 지 어언 두 달. 변화를 무척이나 즐기고 혼돈 속에서 안정을 찾는 이상한 성격인지라, 이 시간이 제법 즐겁고 좋았다고 말하면서 시작하면 좀 그런가. 새로운 도시에서 매주 장을 볼 마트를 찾고 회사까지 가는 제일 맘에 드는 길을 고르는 그런 시간이 참 좋았다. 어쩌면 이 코로나 시기로 여행 제약이 생기는 바람에 이런 작은 시도들이 오히려 소중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적응이 취미이자 특기인 셈이지만, 매번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적응하는 건 그 나름대로의 난관과 교훈을 준다. 잊혀지기 전에 기록해보려고 적어내려가는 글. 



빈 공간을 채워나가는 일


여지껏 살아온 집들이 부모님 집, 그리고선 가구가 다 있었던 집들이어서 특별히 내가 무언가를 채워나갈 일들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넘치는 소비욕이 옷에, 그리고 아주 조금의 편리함을 더하는 전자기기들에서 풀렸던 것 같다. 바로 전에 살던 집이 지금 집의 약 2배 정도 크기이기도 했고 없는 게 없었던 집이라, 전선만 달랑 나와있는 집에 전등을 다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던 이 집이 큰 도전이기도 했다. 내 방식으로 스웨덴을 기억하기 위해 빈티지 의자들을 몇 개 사왔고 예쁜 그릇들을 챙겨왔지만, 꼭 필요한 가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왕초보의 아주 나이브한 생각이었다. 우선 도착하는 짐을 보고 가구를 하나하나씩 사야지 하는 "모처럼 기특한" 생각을 했고, 그래서 전 세입자가 남기고 간 편안한 매트리스에서 자는 3주를 보냈다. 


짐이 도착하고 나서는 박스와 사방군데 나돌아다니는 책과 짐들 때문에 정신없고 호흡기 안 좋은 또 다른 2주를 보냈다. 그 동안 이런 저런 필수 가구를 주문하기 시작했고, 저마다 다른 배송기간을 두고 집에 하나하나 도착하기 시작했다. 매우 질 좋은 가구나 빈티지 가구를 주문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조립하게끔 배송되어 오는 가구들 덕분에, 퇴근 후 가구 조립이라는 퀘스트를 하나하나 해결해야 하기도 했다. 


몰랐던 건 아니지만 가구를 조립해가면서 새삼스레 확인해야 했던 내 성향은 이 기간에 얻은 큰 교훈 중 하나였다. 참 매뉴얼을 안 본다. 대신 굉장히 목표 지향적이라 닥치는 대로 시작하고 진심으로 완성하고 싶어한다. 예를 들면 앞 뒤를 확인해야 하는 조립 부품을 확인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해버린 다음, 아 잘못했구나 하고 다시 푸는 과정을 얼마나 많이 반복했더라... 한번 겪고 나면 더 꼼꼼해질 법도 한데, 완성을 향한 집념이 더 큰지 참 교정이 되지 않았던 것. 그리고선 이사 웬만하면 하지 말자, 가구 그만 사자 같은 엉뚱한 다짐을 하고야 말았다. 


아주 필요하지 않은 것은 사지 않는 연습, 사기 전에 고민하는 연습, 쏙 맘에 들지 않는 것에 조금 더 품을 들여 정을 붙이고 맘에 들게 만드는 연습, 그에 맞추어 내 루틴들을 조금씩 맞추어가는 연습.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다. 지나고 보니 풍요의 성장기를 보내왔고 조금의 부족함도 쉽게 소비하며 채워왔더라고. 이 안 좋은 습관들을 살짝살짝 떼어내가는 과정이 이 집에서 내가 얻을 가장 중요한 교훈이 아닐까 싶다. 

 

잘 몰랐는데 집이 집다워지기까지는 굉장히 많은 품이 든다. 그리고 그 집이 내 집 같아지는 데는 또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2개월이 지난 지금, 이제야 집이 집다워졌고 내 집이라는 느낌이 든다 - 물론 월세지만 마음만은 대출 없는 자가다 :)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 


스몰톡의 비비탄 알이랄까, 나한테는 잘 쟁여둔 한 박스의 총알같은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누구를 만나도 안전한 거리에서 적당하게 웃고 떠들 수 있는 이야기들. 한국을 떠나 살며 스몰톡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알게 되었고, 한국식 이야깃거리 중 많은 소재들이 언피씨하다는 걸 하나씩 배워가면서, 새로운 스몰톡거리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날씨로 30분은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고, 핀트를 맞추기 위해 던져볼 수많은 장르의 넷플릭스 시리즈들이 머릿속에 있고, 쉽게 시작하고 쉽게 관둔 적지 않은 취미활동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는 게 어렵지는 않아졌다. 물론 어색한 자리에서 말이 자꾸 더 많아지는 부작용도 있다. 


어느 집단에 가나 미묘하게 공유하는 공통의 특징들이 있다. 나의 어떤 성향이 맞아서 나는 여기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도 만들지만, 그 특징들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를 해버릴 상황도 많이 있지만 말이다. 특히 나라를 옮겨가며 생활할 때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어떤 나라를 어떤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건 뭘까. 그리고 제대로 알아야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고 여러모로 말을 아끼게 되는 그런 단계인 것 같다. 


인복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저, 사람을 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좋은 태도가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편하게 들어오도록 대문을 열어두는 것 정도가, 내가 하는 노력이다.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게 아닐까 싶고. 너는 인복이 참 많구나 하는 소리를 자주 듣는 편인데, 요즘은 그냥 내가 주변인 이야기를 대화에서 많이 하는 편인가보다 하고 만다. 적어도 그게 고마움이라면 표현하고 담아두려고 하는 편이다. 누군가의 호의가 마냥 고마운 나이브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게 다가오는 선의에 항상 안경을 치켜올리며 계산기를 두드려보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게 살아보기도 했지만 너무 피곤한 일이더라고. 


반면 불쾌한 경험에 대해서는 너무 길게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고, 어느 순간 좋은 것만 기억하게 되는 망각에의 축복을 한껏 누리고 있기도 하다. 가드를 올리고 살기보다 한번씩 그냥 훅 맞고도 다시 일어설 회복탄력성을 기르자 정도로 살고 있다. 하지만 어떤 불쾌함은 옳지 않은 것이기에, 끈을 끊기 위한 노력도 하려고 일어서기도 한다. 가능한 한 정확하게 지적하고 해결가능한 방법을 제시할 수 있도록 노력해본다. 하지만 내 멘탈 지키기와 편견이나 차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균형을 맞추는 게 쉽지 않긴 하다. 


 



개인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는 느낌이 딱 오는 순간이 있는데, 바로 어떤 길을 걸어갈 때 잡생각을 하면서 걸어도 문제 없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다. 고등학교 생활을 기숙사에서 해서 매주 토요일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한번은 부모님이 그 주에 집을 이사하셨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언니와 학교를 나와 집을 찾아가는데, 핸드폰도 허용이 안되던 학교여서 공중전화에서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길을 묻고, 길을 찾아 헤매다가 못 찾아서, 엄마가 우리를 데리러 왔던 때를 기억한다. 그 순간부터 집에 잡생각을 하면서도 찾아갈 수 있는 그 익숙함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잡생각을 해도 될 정도로 주변에 대해 잘 알고 편안해졌을 때, 핸드폰으로 지도를 켜놓고 다니지 않아도 될 때, 그때가 나한테는 "잘 적응했구나" 하고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다. 


얼마 전에 회사에 갔다 돌아오면서 예쁘게 물든 나무들을 보며 한국의 가을을 떠올렸다. 가을의 등산도 생각해보고, 잘은 못했지만 족구하는 워크샵도 생각나고. 전어로 시작해서 도토리묵이 생각나는 그런 퇴근길이었고, 어느새 집 대문에 다와있었고, 별다른 생각 없이 우편함으로 가서 우편물을 체크하고 집으로 올라가는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새삼 뿌듯했다. 그리고선 적응에 대해 써도 되겠다고 생각했고, 지금이 작은 교훈들을 돌아보기 좋은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모로 가을적 포스팅을 하고야 마는, 

윈터타임을 기다리는 토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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