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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al Dec 31. 2020

<러브 앤 아나키>로 만나는 스웨덴

스웨덴 스타일의 로맨틱 코미디

넷플릭스에서 스웨덴 드라마 <러브 앤 아나키 Love & Anarchy, 원제 Kärlek och Anarki>를 보았다. 스웨덴은 나한테 아주 낯선 나라는 아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지난 2년을 그곳에서 일하며 살았기 때문. 그래서 그 나라에 대해 말할 자격이 남들보다 더 있다거나 훨씬 더 잘 안다는 건 절대 아니고, 그저 남들보다 질문이 좀더 많은 상태? 그렇게 스웨덴을 떠난 지 한 3개월 후에 질문과 그리움이 그득한 상태에서 이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7VS9HaEwY8


스웨덴으로 이사를 가기로 한 2년 전, 스웨덴 어떨까 하고 친구들한테 물어보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우리가 알고 있었던 스웨덴에 대한 정보는 별게 없었다. 1) (그 당시 막 광명에 들어온) 이케아의 나라, 2) 스톡홀름 신드롬, 3) 자꾸 스위스랑 헷갈려 한다, 4) 예쁜 국기만큼이나 예쁜 금발들의 나라, 5) 북유럽 복지, 6) 추운 날씨와 백야, 최근 추가된 7) 집단면역으로 마이웨이를 걸어간 나라, 그리고 나의 친구가 살았던 나라. 이건 우리 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스웨덴의 이웃나라 출신이 아니면 이곳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 않다. 독일 친구들도 물가가 어마어마하게 비싼 나라, 더 북쪽이니 겨울에 더 춥고 빨리 어두워지는 나라 정도로 알고 있는 수준. 


이건 우리 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스웨덴의 이웃나라 출신이 아니면 이곳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 않다. 독일 친구들도 물가가 어마어마하게 비싼 나라, 더 북쪽이니 겨울에 더 춥고 빨리 어두워지는 나라 정도로 알고 있는 수준. 


요즘 같이 여행이 힘든 시기, 드라마로 해외여행을 대신 하는 것도 방법이기에 재밌으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좋은 <러브 앤 아나키>를 추천해보고 싶다. 스웨덴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아이 둘의 엄마이자 성공적인 컨설턴트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으며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남편을 둔 중산층으로 살아가고 있는 소피는 그 나름대로 바쁜 삶을 살고 있지만 항상 어딘가 공허하다. 그러다 디지털 마케팅 책임자로 발령난 한 출판사에서 일하는 알바생 막스를 만난다. 서로 너무 다른 소피와 막스는 서로 다른 성격으로 부딪히기 시작하고 아슬아슬한 내기를 시작하며 서로의 삶의 질서에 균열을 내가기 시작한다. 굳이 이 드라마와 비슷한 결을 찾자면  <밀회>나 영국 드라마 <Leaving>일텐데, <러브 앤 아나키>의 균열은 저 두 드라마보다는 훨씬 유쾌하다. 어떻게 유쾌하냐면, 흠... 이건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줄거리나 내용은 넣어두고, 대신 이 드라마에서 만난 꽤 스웨덴적인 장면들을 한번 이야기해보려 한다. 



노란 빌딩과 빨간 코티지들  


그곳에서 살 때는 잘 모르다가 떠나서 다른 풍경들을 보다 보면 알게 되는 특징들이 있다. 예를 들면, 서울 도심의 높은 건물들과 아파트, 조금만 주거지 쪽을 보면 촘촘히 들어선 주택들과 빌라들, 높은 데서 보이는 뒤엉킨 전선들 같은 거다. 스톡홀름의 노란 벽 건물들도 그렇다. 드라마의 사건들이 주로 벌어지는 출판사 건물도 그 노란색이다. 이 노랑색과 오렌지색 사이의 어딘가쯤인 이 색은 스톡홀름 중심가, 특히 Stortorget 주변에 있는 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포스터 뒤에 있는, 저 노랗고 오렌지인 저 색이다!


철강산업(copper industry)의 부산물로 생기는 이 색으로 새 건물의 벽을 칠하게 했던 한때의 규제로, 1622년 이후 17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지어진 많은 건물에서 이 색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스톡홀름 시내의 경우 그렇게 크지 않아서 너무 춥고 어둡지만 않다면 힘을 내 한 나절 걸어다녀볼 만하다. 그렇게 걸어다니다 보면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출판사 건물을 찾기 어렵지 않다. 

1699년 스톡홀름 지도자에 의해 새로 지어지는 모든 석조 건물들은 이 색으로 칠하도록 결정되었고, 17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그런 흐름이 지속되었다고. 


그리고 또 다른 익숙한 스웨덴의 색은 바로 Falu Red다. 남주인공이 어머니 생일 때문에 내려간 시골집이 바로 그 색이었다. 비슷한 시기부터 나무로 지어진 많은 집들이 이 색을 띈다. 팔룬이라는 스웨덴의 한 지역에서 생산되었던 페인트여서 팔루 레드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금만 교외로 나가도 숲과 들이 있는 곳에 드문드문 이 색의 집들을 볼 수 있고, 거의 시골 동네에서는 팔루 레드가 아닌 색을 찾기가 더 힘들다. 

이게 Falu Red. 많은 코티지나 오래된 집에서 이런 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Strängnäs, 스톡홀름 근교에서)

  

 

스웨덴식 빈부격차


드라마의 배경이 익숙해지고 나면, 다음 보이는 건 플롯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스웨덴의 복지제도는 좋은 편이다. 건강보험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정신병이 있는 소피의 아버지는, 평범하게 행동하지 않는 아버지이자 보고 싶을 때 편하게 만날 수 없는 할아버지로 그려진다. 한국의 여느 드라마처럼 소피가 그런 아버지 때문에 어려운 가정환경으로 힘겹게 자기 앞가림을 하며 고학을 한 걸로 그려지지 않는다. 물론 소피의 남편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소피보다 부유한 환경에서 예술을 하며 자라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소피가 아버지로 인해 남편과 불편한 대화를 하곤 하지만, 그건 가정환경의 차이라기보다 정상적이지 않은 소피 아버지에 대한 남편의 태도 때문이다. 


소피와 막스도 경제적으로 큰 차이가 난다. 소피는 본부장급이고 막스는 IT 파견직원이다. 정규직이 되고자 노력하는 막스와 직접적이진 않지만 팁을 주는 소피의 관계는 시작부터 동등하지 않다. 소피는 스톡홀름 시내에 있는 누가 봐도 멋진 집에 살고, 막스는 3명의 친구들과 플랫을 쉐어한다. 제대로 된 문도 없이 커튼으로 가려진 방에서 지낸다. 하지만 그걸 비추는 방식이 이런 경제적 차이라기보다는, 나이 차이에 따른 사회적, 직업적 숙련도의 차이에서 기인한 정도로 보인다. 이 드라마에서 빈곤과 가난함이 주는 모멸감을 찾으려면, 음... 엄청 심사가 뒤틀려있지 않는 한 힘들 듯 하다. 


이게 신기했던 건 수많은 한국 드라마들의 공식들이 여기선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재벌과 '실장님'이 안 계셔서 그랬고, 가난함과 자존심 같은 자연스러운 인과관계가 없어서였다. 아픈 부모가 가난한 지금의 나를 만들지 않아서 그랬다. 아마도 튼튼한 건강보험이 보여서였겠지. 사회적 안전망 이야기를 이런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에서 찾는 게 너무 정치적이어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안전망이 자연스레 제거해버린 불필요한 설정들이 어떻게 보면 굉장히 스웨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드 <프렌즈>에 나오는 레이첼이 결혼을 파토내고 와서 경제적으로 자립하려고 카페 알바를 하던 시절, 들어놓은 보험이 없어 친구 모니카의 이름으로 진료를 받는 에피소드가 굉장히 미국적이듯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W7Soc8LdfpY


다양성에 유난떨지 않는다


다양성은 어디서나 큰 화두다. 스웨덴 정부나 많은 기업들도 다양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유난스럽지 않다. 이 드라마에서도 그렇다. 큰 이슈가 된 헐리우드가 비백인들을 다루는 방식과도 비교할 만 하다. 여성인 보스가 나오면 그걸 호들갑스럽게 남자들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독한 캐릭터로 그린다든지 하는 것도 마찬가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웨덴이 미국보다 다양성의 측면에서 더 잘하고 있는 나라인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긴 쉽지 않다. 다만 다양성에 유난을 떨지 않는 태도는 내가 짧은 기간 동안 그곳에서 일하고 생활하면서 참 좋아했던 환경이었다. 내가 어떤 지점에서 이렇게 느꼈는지는, 평소 미드를 많이 봐온 분들이라면 그리고 영드와 미드에서 이 차이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봐온 분들이라면 아주 쉽게 캐치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한다. 

스웨덴 일반버스에 붙어있었던 '가족 나들이용 버스 요금제' 브로슈어의 이미지 - 세상엔 다양한 가족들이 있답니다!



그리고... 


특이한 스웨덴 문화나 에티켓 같은 것들이 보일 때 재밌었다. 예를 들면, 이 출판사 사람들이 모회사를 대상으로 엄청 충격적으로 별로인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불편한 발표 후에도 회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악수를 하고 자리를 뜨는 장면. 스웨덴의 비즈니스 에티켓 중 하나가 공적인 미팅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 것이다. 7명이 그 미팅에 있었다고 하면 총 21회의 악수가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가끔 악수를 생략할 만큼 대규모 미팅은 아닌데 3-4명이 넘게 참석하는 미팅을 하게 되면, 그 악수회(?)의 어색함을 견뎌내는 게 참 어려웠다. 그 어색함이 기억나 한참 웃었다. 미리 통보하고 하는 전체 미팅이나 번과 함께 하는 피카(함께 모여 커피를 마시는 브레이크 타임), 성대하게 차리고선 디제이까지 부르고 부모님들까지 모여 하는 애들 생일파티 같은 것도 마찬가지. 내 얼마되지 않는 경험을 연결해보는 재미가 솔솔했다. 새롭게 이곳의 문화를 발견해가는 즐거움은 낯선 스웨덴어를 듣는 비용 대비 클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이 드라마는 위에 내가 언급한 것들을 차치하고 스웨덴과 그 문화에 대한 이해 없이도 가볍고 즐겁게 볼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다. "비주얼 훈훈" 같은 간단 명료한 수식어로도 충분히 플레이 버튼을 누를 만한 그런 드라마. 여주인공 소피의 패션은 분명 여러 스웨덴 의류브랜드를 찾아보게 할 거고, 귀여운 남주인공 막스는 역시 잘생긴 스웨덴 남자라는 여러분의 편견을 강화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스웨덴식 대화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6개의 에피소드도 매력적이다. 문학계와 다양한 미디어의 변화, 세대의 이동 같은 소재를 다루는 방식도 재미있지 말이다.


원래는 약 파는 사람처럼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무리 클릭 한 번으로 플레이가 된대도 낯선 언어로 된 드라마를 쉽게 선택하게 되지 않는 걸 알기에 결국 열심히 팔아보게 되었다. 이를 통해 얻은 교훈은 1) 내가 영업직이 아니어서 참 다행이고, 2) '왜 난 좋아하는 것도 많은데 덕질을 잘 못할까의 예'를 이렇게 증거로 남겨버린 점이랄까. 


12월 동지와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나면 '이제 낮이 더 길어지는 것만 남았다'며 눈을 기다리는 스웨덴 사람들의 겨우살이가 갑자기 그립고 (인간은 역시 망각의 동물이다...), 막스보단 소피의 나이에 더 가까운 내가 마지막 화의 소피처럼 나답게 잘 살고 있나 돌아보게 하는 2020년의 마지막 날이다. 


눈이 많이 내렸던 어느 날 만든 눈케잌 먹고 즐거운 새해 맞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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