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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gal Apr 30. 2021

처음 해보는 일들

부엌과 나


새로 이사가는 집에는 부엌이 있지만 없다. 부엌의 명목으로 있는 공간과 하수구, 파이프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잘 설치되어 있지만 벽에 보이는 그 연결구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게도 부엌이 항상 맞춰져 있는 집에만 살았었다. 전 세입자로부터 구매할 필요도 없이 아예 렌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부엌을 맞추는 것에 대한 경험이 하나도 없다. 서랍식 장이 여닫이보다 공간 활용이 편하다거나 (그래서 돈을 더 내야 한다), ㄱ자 형태의 부분의 장에는 회전형 선반을 하는 게 좋다거나, 바닥색에 어울리게 작업대 판 (이름도 모르겠음...) 색을 골라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나도 궁금해 한 적 없었고, 그래서 물어본 경험도 없다.  


이사 가서 오래 살면 좋겠지만 완전 내 집도 아니고 아직 동네가 실제론 어떤지 이웃들은 조용한지 아무것도 모르니 1) 너무 이 일에 진심이고 싶지 않고 2) 그렇다고 대충 제일 싼 걸로 해주세요 하긴 싫은, 뭐 그런 상태다. 자재나 가전 브랜드가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것들의 적정한 가격 수준도 모르는데다가 트렌드도 모르는 나는, 어떤 세일즈 담당자에게 걸릴지 모르겠지만 아주 좋은 호구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심지어 코로나로 인해 대면 미팅을 전혀 하지 않고 샵 방문도 불가능한 상태라, 질도 좋지 않은 인터넷 상태에 비디오 미팅으로 대충 저 베이지가 이 베이지랑 어떻게 다른지 느낌적 느낌으로 보며 끊임없이 돈 들어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예전에 백화점이나 이케아를 가도 편한 암체어에 앉아보고 아기자기한 소품이나 구경한 게 전부였던 터라 도움이 될 경험이란 게 전혀 없다. 이게 왜 어려운 일이냐면 원래 관련 정보가 있는 상태에서 그런 설명을 듣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인생에서 한번도 해본 적 없는 고민을 설명을 듣는 순간 시작함과 동시에 결정까지 내려야 하는 점 때문이다. 물론 여러 협상과 조율의 과정이 있어 확답을 주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가 결정되면 다른 스텝들에 영향을 주게 되고 혹시나 번복할 시 다시 1단계로 와서 같은 논의를 해야 할 수 있는 점 때문에 나도 모르게 신중해진다.  


아무튼 이렇게 첫 2시간 콜을 마치고 얼토당토 않은 금액의 견적을 받고 나니, 이제야 부엌을 설치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부동산 중개인에게 수도관은 어디 있는지, 세탁기를 설치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어디 있는지, 정확한 길이들은 어떻게 되는지 다시 확인했다. 블로그나 유튜브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들 하는지 알아보려고 이 언어, 저 언어로 찾아보며 감을 잡아보려 노력해보았다. 다른 업체들에 약속을 여러 개 잡았고, 그 중 몇 곳은 내가 이사가는 날 정도는 되어야 약속을 잡을 수 있다고 하여 포기했다.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이사가기 전까지 포함해 9개월 정도를 산 지금 집도 처음엔 텅텅 비어있었다. 이삿짐이 계획대로 도착하지 않아 전 세입자가 준 매트리스에서 자던 시간만 거의 한 달이었고, 짐이 도착한 이후부터는 박스를 풀어 짐들을 널어두는 것에서 시작해 가구를 사서 그 안에 짐을 쑤셔넣는 도전이었다. 가구를 사는 것도 처음이었다. 서울을 떠나 와서는 항상 가구가 있는 집에 들어가 살았었다. 지금 집은 워낙 집이 바닥도 천장도 나무색이라 가구를 사는 데 제약이 많았다. 어두운 나무색들로 고르다 보니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은 경우도 있고, 디자인이 괜찮으면 가격은 또 너무 높고, 집에 벽이 많지 않아 조화롭지 않았던 경우도 있었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그 결정과 기대와 고민과 실망의 사이클이 너무 지겨워서 대충 사서 쓰다가 나중에 이사가면 다시 사야지 하며 산 몇몇 시원찮은 가구나 소품들도 있다. 이렇게 빨리 이사갈 줄 알았다면 차라리 안 사는 게 나았을 그런 것들인데. 이제 겨우 가구를 살 때 고민해봐야 할 것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조화로움이 뭔지 아주아주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스웨덴에서 봤던 예쁜 빈티지 가구들을 하나하나 사다가 트럭으로 배송해오고 싶지만, 아주 예전에 실천하고 소화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읽고 듣고 보았던 미니멀리즘과 무소유의 이론들이 내 손목을 잡으며 그만하라고 말려주어 다행이다. 


나도 무언가가 주어지는 순간 어느 정도의 노력은 한다. 그런데 그 주어진 일이 재미가 없거나 내 스타일이 아닐 때는 해치우려는 성향이 강하다. 지금도 빨리 결정을 마무리하고 이 일을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크다. 아마도 최소 4-5천 유로는 드는 결정임에도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면 슉 끝내버리고 싶은 마음. 가구도 그랬다. 글을 쓰고 동영상을 찍고 엑셀 파일을 관리하며 이런 일들을 꼼꼼하게 해나가는 사람들이 결국 블로그도 하고 유튜브도 하는 거라 뭐가 닭이고 달걀인지 알아차리긴 어렵지만, 검색하고 조사하면서 본 여러 사람들의 경험담 속에서 과정도 충분한 시간을 들여가며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만들어가는 걸 보며 또 이렇게 배웠다. 


그게 행복이든 완성이든 재미든 뭐든 간에, 무언가를 유예하는 삶과 해치우는 삶은 결이 같다고 생각한다. 후딱 무언갈 해치우는 건 더 기대되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니까. 인생을 (고3처럼 치열하게는 못 살겠으니) 고2처럼 막연한 미래에 좋다 생각하는 것을 죄다 얹어두면서 이게 지나가면 다른 좋은 게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해외에서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내가 머무는 곳이 디폴트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의무감이나 로열티도 없는 상태에서 살다보면 너무 많은 요소들에 너무 많은 옵션들이 쏟아진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선택지가 어려운 이유. 그렇다고 뭐 하나를 고정해버리고 싶지도 않은 마음. 굳이 해외생활의 경험이 아니고도, 처음 이직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너무 수월하지 않은가. 이제 나도 감이 생겼는지 아니면 선택지가 많은 게 힘겨워졌는지, 몇몇 팩터들은 슬슬 장기적으로 고정시켜도 될 정도로 확신이 생겼다. 물론 나의 결정체계의 핵심은 "아니면 말고 + 어쩔 수 없지"다. 


요즘은 스트레스의 톨러런스가 낮아져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 생기면 내가 이 일을 잘 해내고 싶은가보다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잘할 생각은 없었는데 잘하고 싶어졌나보다. 잘하는 게 뭔지도 모르는데 잘하고 싶어진 걸 보면 처음은 언제나 이런 것 같다. 그래도 아니면 말고, 망하고 손해를 봐도 어쩔 수 없지 하는 자세와 함께라면 그 어떤 새로운 일들도 지나고 보면 웃을 수 있는 에피소드가 되리라 믿으며. 그래봤자 나는 요리사도 아닌데 부엌이 부엌이지 하는 생각으로 날 위로하고, 두 번째는 더 잘하겠지 막연히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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