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그리고 내 속도 찾기
이번 2주는 매우 특별했다. 우선 이 14일 동안 거의 80%가 좋은 날씨였고, 주로 그 날씨에 일을 안했다. 잠시 일기를 확인해 보니 행복이란 단어를 너무 많이 썼고, 그만큼 진부하지만 소중한 시간들을 보냈다. 행복의 threshold가 낮은 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바를 넘어서는 건 선택이기에, 내 선택 옆에 자랑스레 서보기로. 휴가로 들어서는 길이 좋았고 휴가로부터 나가는 길도 좋으리라 믿으며, 한번 정리를 해볼까.
작년 이맘때도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었고, 거의 시작과 동시에 다니던 회사가 필수 운영에 들어가는 아주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전 직원을 일시해고를 했다. 거의 기존 월급에 가까운 수준을 받고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물론 인력감축의 대상이 아닐 안전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쉽게 문 닫지 않을 그 나라의 국민기업을 다니고 있었기에 큰 위기감은 없었지만, 그 시점이 나에게 준 건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이고 일인가"를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전 회사의 내 자리에는 큰 재미는 없었지만 거의 방종에 가까운 업무상 자유가 있었다. 방종이란 표현을 쓴 건 정식 헤드가 없는 상태로 운영된 지 근 1년이 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계약서에 싸인을 했던 때와 다른 속도를 가진 조직이 방향마저 흔들리고 있던 때라, 사명감과 로열티가 없는 나는 이 시기를 이직의 기회로 삼았다. 그러던 furlough 첫 주에 지원서를 낸 회사 중 하나가 바로 지금 일하는 회사였고, 이 회사랑 일하기로 하고 정식 오퍼를 받은 게 1년 전 이맘때. 망설이거나 주저할 틈도 없이 휘몰아치는 결정의 시기였고, 지금 회사가 여유롭고 평화로웠기 때문에 그렇게 최대 40%만 일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작년 9월에 이곳으로 이사와 이주를 하게 되었다. 그 유명한 스웨덴의 여름을 마치 임금 피크제를 즐기는 준 은퇴자처럼 즐겼다. 그때가 엄청 멀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그 사이의 시간들에 기억에 남을 경험들이 꼭꼭 들어찼기 때문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본다.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참 잘한 결정이란 생각이 든다. 전 회사에 남아있었다면 누가 봐도 내 자리였을 크로스 펑셔널 조직의 리드 자리가 얼마 전에 열렸었고, 지나온 자리에 후회는 없다. 내가 필요할 때 원하는 걸 줄 수 있는 조직이 나에겐 적합한 조직이라는 교훈을 얻었고, 지금 회사는 나에게 그걸 주고 있기 때문에 만족스럽고 지난 회사는 그때 그걸 주지 않았기에 떠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남지 않는다. 그곳에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은 여전하다. 내가 다른 선택을 하고 그곳에 남아있었어도 난 여전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잠시 생겼지만, 아무래도 쉽게 상상이 되진 않는다.
그러고 보니 3년 전 이 시기에는, 먹을 걸 좋아하는 내가, 화나도 먹는 걸로 풀었던 내가 식욕을 잃을 정도로 힘들어했던 논문쓰기를 마치고 학교 앞 인쇄소에서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논문을 제본하여 학교에 제출하고선 그 동네에 있던 친구들과 함께 햄버거에 맥주를 즐겼었다. 그리고선 아마도 모로코로 여행을 가서 우박과 모래바람을 맞았던 기억도 있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3월에서 4월로 넘어가는 순간이 참 오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한테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던 시기였고, 봄이 주는 생동감의 힘을 빌어 조금은 충동적이면서도 과감한 도전들을 오기도 했던 것 같다. 과감할 일이 없는 올해는 이사를 결정했다. 노는 김에 남들 일하는 시간에 여기저기 뚜벅이로 걸어다니다 발견한 아름다운 동네에서 마침 열려있던 세입자 찾는 광고를 보고선, 다음 날 곧장 뷰잉에 갔다가 후다다닥 결정해버렸다. 타이밍도 좋았고 그 곳에 관심이 있었던 다른 사람들보다 안정적이고 심플한 재무상태도 한 몫을 한 듯 하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뷰가 아쉬운 거 말고는 내 기존 요구사항을 다 만족하는 곳을 좋은 가격에 찾았고, 이제 찐여름이 오기 전에 이사를 준비하는 일만 남았다. 올해 이 시기도 이렇게 기억에 남게 생겼다. 내년 이맘때 "역시 날씨 좋을 때는 중요한 결정을 하면 안돼" 같은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나는 굳이 후회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 같다. 메탈음악을 사랑하거나 싸움이 잦은 커플만 주변에 없다면 나는 그런대로 행복할 것 같다.
좋은 인연들은 주로 늦여름과 가을에 많이 찾아왔으니 꼭 이맘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한 해를 살진 않겠지만, 이 시기의 내가 앞으로도 계속 이랬으면 좋겠다고 바라본다. 찾아온 기회에 why not? 하며 조금 다를 나를 상상해보고 너무 무모하지 않을 정도의 결정들을 내리면서 말이다.
샐린저 문체를 좋아한다. 뭔진 모르겠는데 소리내서 읽을 때 착 달라붙는 문장 같은 게 많아서 좋다. 인물들이 흔들거리고 불안한 것도 좋다. 프래니가 못 견뎌하는 지적 허영에 같이 질려할 수 있어 좋고, 주이는 좀 어려워서 좀더 한번 더 깊게 읽어보려고 한다. 속도가 막 나는 책은 아니었지만 그래서인지 천천히 읽고 싶었고, 한번 더 깊게 읽고선 이 책이 던지는 질문들에 나 나름대로 답을 써보고 싶어졌다. 이 책은 미국 10대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하루키가 사랑하는 책으로 한국에선 유명하고, 이 책 주인공의 이름을 딴 한 배우이자 가수 때문에 알려지기도 했다. 그래서 알고 있다가 읽어보는 거다, 나도.
원래 예고편만 보고는 볼 생각을 안했을텐데, 고마운 친구가 예고편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빈지왓칭을 해버린 드라마 <지니와 조지아>. 그러다 많이 비교되는 <길모어 걸스> 생각이 나서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드라마를 온스타일에서 보던 나도 참 어렸네. 개인적으로는 <길모어 걸스>에 나오는 대화 속도나 위트를 더 좋아하지만, <지니와 조지아>의 엄마의 삶의 지혜는 priceless하다.
두 드라마의 주인공 둘 다 읽고 쓰는 걸 좋아한다. 가끔 10대들이 드라마에서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책을 들고선 토론하는 걸 볼 때, 흥미로만 책을 읽어왔던 나는 그 깊이가 궁금하고 부럽다. 집요하게 읽고선 내 생각을 만들어가는 걸 아주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탄탄하게 해온 건 아니라서 더욱 그런 것 같다. 모든 소녀들이 실제로 문학소녀들은 아니겠지만, 그리고 원숙한 작가들의 말과 글이 투영된 그런 소녀 주인공들이겠지만, 그래도 마구 던져지는 의견들에 흠 그럴수도 있겠다 하고 리트릿하는 무방비한 내가 상대적으로 어리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튼 아직 10대, 20대의 불안함와 불안정함이 꽂히는 주제인 게 재밌고, "이제 됐다, 그만 넘어가자"할 날이 내게도 올까 궁금하다. 그리고 보니 나는 이제 두 드라마에 나오는 엄마들의 나이에 더 가깝네. 구원을 꿈꾸기엔 삶의 애착이 많고 이 모든 게 신경질적이기엔 게으름이 더 큰, 당신의 신경질에 "내말이"하고 공감하며 구원을 찾는 당신에겐 다른 말 없이 Kudos를 외치는, 딱 거기에 내가 있다. 얼마나 길게 여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쉽게 다음 발을 뗄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새로 알게 된 친구 하나가 있다. 비건을 지향하고 페미니스트며 철학을 전공하는 친구다. 아이러니한 건, 논비건 초콜릿 크레이빙에 너무 쉽게 무너지고, 같이 알게 된 친구 4명 중 가장 왜곡된 바디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남자들의 관심에 제일 예민해하며 일희일비한다. 그 친구의 노력을 존중하고 많은 부분 공감하면서, 읽고 믿는 바와 행동하는 게 다른 이 친구를 보면서 안다는 건 뭘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실은 주변에서 이런 경우를 본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에 한번 이해해보고 싶었다. 내 안에도 이런 조각을 발견할 때가 있어 더더욱 알고 싶었다.
지금까지 생각해본 바로는, 불균형을 바로잡아 균형을 이루려면 여지껏 기울어져있던 것들을 제대로 만들기 위한 반대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도 모르게 당연하게 자리잡은 것들을 머릿속에서 쫓아내려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니깐. 나한테도 그런 불일치의 순간이 분명 있으니깐. 그 불일치의 순간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참 불편하다. 그러다가 "에이 몰라, 이게 난데" 해버리면 지는 거다. 그런 적도 사실 몇 번 있다. 하지만 불일치를 보면서 그 모순을 해결해나가면 그 차이는 조금씩이라도 줄어들어간다.
"아름다운 언어에 속지 말라"는 이야기가 이번 주에 계속 걸렸다. 내가 표현해낼 수 있는 세계와 믿음이 나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내가 말하는 게 나라고 믿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침대에 누워 스크롤을 내려가며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서 잔다르크가 된 것 같이 느끼고, 편한 의자에 앉아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누군가의 가난을 이해한 듯 군다. speak up이라고 말하지만 결국은 익명성에 숨어 type out 하고는 만족해버린다.
아는 건 여전히 중요하다. 검색이 쉬워진 요즘 무엇을 아는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전히 당신의 검색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다. 온전히 당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검색한 것에서 무엇을 당신 뇌 속의 쿠키로 가져갈 것인가, 많은 링크 중 어떤 걸 정보로 선별해서 읽어낼 것인가 또한 알고리즘의 현란한 장난 속에서 당신이 추가로 들여야 하는 발품이다. 그리고선 어떤 걸 행동으로 옮겨낼 것인가까지.
모순적인 사람이 되기 싫어 내가 행동할 수 있을 만큼의 차선을 이야기하는 삶을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다, 좀 길게. 아마 저 친구도 페미니즘이나 환경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면 누군가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는 방향이 잘못된 게 아니니 모두 자기가 할 수 있을 만큼 발을 내딛는 것이다. 허나 그 말과 글로 충분히 안심이 되고 만족감이 생긴다면 그건 위험하지 않을까. 노력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싶지 않고, 그들의 치열한 도전을 무시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과 시간들이 만든 체계의 문제가 바로 저 친구의 모습이기 때문에. 친해진 지 얼마 안 되었고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서 아직 저 친구에게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언젠가 그런 시간이 오게 된다면 물어봐야지. 넌 어느 쪽이냐고, 네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은 어떤 거냐고. 그리고 나도 나에게 끊임없이 "왜"를 물어볼 차례. 당연하게 그럴싸한 의견에 마음을 얹고선 이해한 듯 굴며 만족하지 않게. 아는 게 독이 되지 않게.
쓰는 일은 귀찮다. 귀찮아하다보니 더 귀찮아진다. 생각을 정리해야 하고, 정리하며 써진 걸 읽어야 하고, 대단한 게 뭔지 알면서도 대단하지 않은 나의 결과물을 보는 게 괴롭기도 하다. 그냥 뱉고 보는 말들에서 평소 호흡의 속도를 느끼고 토닥이고 반성하며 또 다짐한다. 귀찮은 마음과 싸워서 이기는 건 discipline이다. 명령과 의무가 싫어서 떠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떠나와서는 이제 스스로 만들어가려는 게 습관이고 질서인 게 참 아이러니하다.
휴가에서 나가는 길, 날씨가 흐리고 집에 앉아있는데도 발이 시렵다. 에버랜드에서 자유이용권을 끊어 문 열 때부터 뛰어들어와 신나게 놀고선 마지막 쇼를 보고 뭔가 뭉클한 클로징 음악이 아닌 척하며 등을 떠미는 가운데 미련없이 출구로 향하는 기분. 기한이 있는 자유라니, 이 얼마나 내 휴가 같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