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tflix Junkie 의 고백
잊고 있었다. 항상 같이 있어서, 없어도 된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시작은 새로 이사간 집에 홈시어터에 가까운 가전이 있으면서부터였다. 게다가 스마트TV여서 쉽게 넷플릭스, 아마존프라임, HBO를 동시에 구독하며 여가를 보내곤 했다. 외부 활동에 제약이 많은 시기에 TV는 커녕 아무것도 없는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스트리밍 서비스로 집에서부터 집으로의 퇴근 후 시간을 보내곤 했다. 물론 올해 들어 절대적인 소비량은 줄었지만, 그래도 꼭 있어야 되나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한 유튜버의 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미니멀리스트 유튜버로 시작했는데 라이프스타일이나 철학적인 메시지를 자기 방식으로 잘 소화해서 간결하게 전달하는 게 마음에 들어 가끔씩 찾아보는 채널이었는데, 이 영상에서는 무섭게 자신이 넷플릭스를 봐온 시간을 갑자기 더하기 시작한다. 가끔 그냥 백그라운드 노이즈로 가벼운 레전드 시트콤들을 본 것도 또 틀어놓고 뭘 한 적도 많을 정도로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영화/드라마/다큐 스트리밍 서비스)에의 의존도가 높은 편이라, 내 잉여력을 수치화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현실 인식이 되면서 실제로 계산해보지 않기로 했다. 사실 한국 드라마를 몰아볼 때 유난히 그 50분 정도가 되는 한 편이 지루하게 전개될 때 내가 저 16부작 미니시리즈를 다 본다는 건 16시간을 이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 거네 같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영어로 된 드라마에는 그런 자각이 들지 않았던 게 참 신기하다. 영어공부라도 되겠지 하면서 틀어놨던 것들이 결국은 완벽하게 알아듣지 못한 것과 알아들은 것의 경계마저 보이지 않게 문맥적, 상황적 이해력만 높여주어 어쩌면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영어실력에는 오히려 마이너스였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 모든 생각이 자, 이제 너의 잉여력 KPI를 측정해보자는 하나의 돌이 호수에 던져지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의 자세가 삶에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거리를 두게끔 해주는 장점이 있다면, 다른 한 편으로는 마치 무언가가 지나가고 나면 더 나아질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갖게 하는 단점도 있다. 안 지나갈 수도 있는데. 그냥 계속 머물러 있을 수도 있는데. 그동안 언젠가 끝나겠지 하며 코로나 시기를 그저 수동적으로 흘러가게만 두었다면, 이제는 좀더 능동적으로 이 기간에 테스트해볼 습관들이 있다면 여러모로 시도하고 실패라도 해보는 시기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중 첫번째 시도가 넷플릭스 구독 해지다.
쌓아둔 책들과 읽지 않고 배부른 마음 덕분에 뭔가 복잡했었는데, 거기에 숨은 X맨을 찾은 듯 하여 기쁘다. 사실 나도 어떤 영감이나 새로운 시선들을 영상으로 통해 배우는 경우가 더 많은 밀레니얼이라, 좀 두렵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떠먹여주는 영상들 덕분에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깨달음에 확 즐거워졌다가 그 깨달음이 뭐였지 싶은 순간들도 많았어서 결국은 뭐가 많이 남지 않은 경우도 많다. 마치 내 치아들 같다. 이번에 한국에서 치과에 갔더니 내 치아가 깊게 뿌리가 있지 않아서 뭐 씹는 데 많이 불편했겠다고 하는 의사쌤의 말에, 흠 엄마가 매번 넌 씹는 게 어색하다고 했던 말을 기억해냈고, 씹는 게 귀찮아서 대충 삼켰고 그러다 보니 뿌리깊게 자라지 못한 내 치아가 다시 씹는 걸 방해해 결과적으로는 대충 씹혀진 음식물이 위 건강을 괴롭히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다가 둘이 결국 뭉텅이로 콜레스트롤만 높이는 뭐 그런 효과인 셈이다. 그래서 내 결론이 뭐냐고? 지금이라도 열심히 씹어야 더 늙어서도 얼음을 잘근잘근 씹어먹고 오징어도 씹어삼키는 노인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열심히 씹는 연습을 하고 있다. 콘텐츠의 소화능력이 떨어졌으니 절대량을 줄이고 오랜 시간이 증명해준 것들로부터 천천히 꼭꼭 씹어먹기를 시작해보는 거다. 얼마나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짧게 끊어진 에세이들과 오디오북이 날 즐겁게 해주고 있고, 진짜 무언가가 보고 싶을 때는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는 주의.
비슷한 맥락에서 영어사전, 독어사전을 스탠딩 책상 한 쪽에 두고 틈날 때마다 찾아보기를 하고 있다. 궁금증이 생기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을 다 내 손 안의 스마트폰에서 해결한 지 오래라, 이제 약간의 과정을 더 넣고 싶고 그러면서 더 길게 궁금해하고 좀더 소중하게 뇌에서 기억하게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유난이다 싶지만 유난을 떨지 않으면 너무 쉽게 편리함에게 지고 만다. 그리고 편리함에 양의 가중치를 난 너무 후하게 준다. 그래서 더더욱 유난스러워보려고 한다. 그래서 겨우 찾아지는 균형이라면 말이다.
봄이라고 달리기와 자전거타기가 너무 하고 싶어짐과 동시에 때마침 찾아온 폴렌이 발목을 잡는다. 모른 척 하고 싶은 대로 했더니 얼굴 피부가 뒤집어졌다. 가끔 환기시켜야지 하며 열어둔 창문 덕분에 들어온 꽃가루들이 저녁 잠을 방해하기도 하고, 달리다 숨쉬기가 힘들어져서 멈춰야 했던 적도 있다. 하지 말래니 더 하고 싶어지는 마음 하나, 겨울을 그렇게 잘 버텨내고 봄이라고 좀 놀랬더니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며 억울한 마음 하나. 알레르기가 심한 한 전 회사 동료가 귀에 무슨 칩을 심었는데 그게 알레르기를 줄여준다고 한 게 기억나고, 어렸을 때 팔에 어떤 칩인지 주사를 맞았더니 천식이 사라졌다는 친구 이야기도 기억나고. 매년 오는 건데 매번 이렇게 제약을 받는 게 싫어서 뭐 적당히 괜찮은 시술로 이를 해결할 수 있다면 쉽게 돈과 몸이 움직일 것 같다. 그런데 굳이 따지면 매달 하는 월경도 인류의 반이 겪어내고 있는데 달라지는 게 없다면 알레르기라고 많이 다를까 싶기도 하고.
지금 내 나이는 엄마가 둘째인 나를 낳고 그 아이가 그때의 엄마가 어땠는지 인식하고 기억하기 시작하던 나이다. 그러니깐 나는 내 나이의 엄마를 기억한다. 그때의 엄마와 많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나지만, 아직도 이렇게 내 몸도 내 머릿속도 내 생활반경도 잘 모르겠는 나이에, 말하면 뭘 알아듣고 어줍잖은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키워야 했을 엄마를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복잡하다. 복잡한 마음 안에 뭐가 있을까 들여다 보면서, 강박적으로 인풋의 양에 집중했던 그 가난한 마음 속도 같이 챙겨가면서, 좀 느리고 답답하지만 방향은 제대로인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보겠다는 말을 이렇게 또 다르게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