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과 쓰레기: 궁상과 유난을 선택할 수 있기까지
이번 기간에는 이것저것을 주제별로 많이 읽고 볼 시간이 났다. 이 모든 게 2주 전에 다짐한 스트리밍 서비스 끊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유튜브 채널을 몇 개 보긴 했지만, 유튜브 네이티브가 아니어서 그런지 영상 하나나 두 개 정도 보고 나면, 마이 묵었다 하고 끄게 되니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이번 주에는 마침 환경에 대한 주제에 관심이 생겨서 드디어 맥락있는 격주정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번 2주간의 키워드는 플라스틱과 쓰레기였다.
플라스틱에 대해서는 이미 고민을 많이 했었고 나름대로 언더컨트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는 아니었다. 시작은 산드라 크라우트바슐의 <우리는 플라스틱 없이 살기로 했다> (원제: Plastikfreie Zone) 였다. 2010년 즈음 산드라의 가족이 시작했던 도전이고 2012년에 책이 출간되었으며 지금 산드라는 녹색당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걸 보니,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플라스틱을 사용하고 있던 그때부터 이루어진 그 논의들이 지금 이렇게 DACH 지역에 결실을 맺어가고 있고 지난 10년을 "끝이 좋으니 다 좋군" 하며 볼 수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읽었던 쇼핑 끊기 책 <매달 통장 잔고를 걱정했던 그녀는 어떻게 똑똑한 쇼핑을 하게 됐을까>의 작가 누누 칼러도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는데, 열심히 자신에게 주어진 영역에서 어떻게 하면 환경에 도움이 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책을 쓴 경우를 두 번 보고 나니 저 나라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에 의한 호감이 막 생긴다. (이제 격주정리 13회차, 나도 자기인용이 가능해졌다!!!)
이 책이 재미있었던 건 어떤 새로운 도전을 할 때의 장애물들을 잘 보여주는 점 때문이었다.
1.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고 하는 도전은 처음부터 힘들다: 산드라의 가족은 집에 있는 터퍼웨어, 플라스틱이 조금이라도 들어간 도구들을 최대한 없애면서 시작했다. 아내가 플라스틱 통들을 모아두는 게 별로였던 남편은 무척 찬성하지만, 플라스틱이 없으면 청소기도 없고 칫솔도 없고 인형도 없고 생각보다 많은 게 그냥 없어진다.
2. 이렇게 좋은 뜻을 가지고 시작하고 나면 주변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산드라의 좋은 친구 중 하나는 이 도전을 응원하며 주변에 묻고 직접 찾아보면서 산드라가 이 도전을 이어갈 수 있게 좋은 팁과 정보들을 구해다준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많지 않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이건 너무 극단적인 게 아니냐"며 딴지를 건다.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좋은 궁금증은 좋지만 애도 없는 싱글에게 "넌 애 낳으면 그 애한테도 고기 안 먹일거야?" 같은 질문을 한다거나, "밀크는 원래 젖인데, 오트밀크나 아몬드밀크라고 하는 거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설명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거나, "스프에 몰래 고기 넣어야지" 같은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당신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당장 고치라고 설파하지 않아도 마치 본인의 삶을 방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시도하는 사람들의 의욕을 꺾어놓는 사람들이 꼭 있다. 지금이야 플라스틱의 유해성과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인지하고 있지만, 2010년엔 지금보다 더 심한 참견질을 견뎌야 했겠구나 싶어 시간차 있는 위로를 작가와 가족들에게 보냈다.
3. 내면의 갈등도 온다: 잘 지내다가도 그런 사람들의 말들이 마음에 꽂히는 순간들이 온다. 그게 이 책에서는 이 결정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남편의 소리일 때도 있고, 좋은 취지는 공감하지만 실제로 코카콜라를 사랑하는 딸을 어떻게 설득할지 모르겠다는 지인의 의문일 때도 있고, 인터뷰를 하던 기자가 "지금 신고 있는 스타킹에는 플라스틱이 없나요?"라고 물어올 때이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돌아볼 내 안의 견고한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 이 작가의 가족에게는 "재미없어지면 그만한다"이고, 나한테는 "너무 억울해지면 그만한다"다.
4. 공부는 필수다: 모든 제품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면, 의외로 많은 유리병 제품들에 플라스틱 마개나 금속 마개의 안전장치로 들어간 플라스틱/실리콘이 쓰인다. 종이포장도 그냥 종이가 아니라 속에 플라스틱으로 코팅된 경우가 많다. 이 정도면 세상이 나에게 No하고 외치는 것과 같을 정도다. 그래도 그러한 노력들 덕분에 모르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5. 도전이 멈추어갈 즈음 결정해야 한다, "Go or no go": 대부분의 책들은 Go이기 때문에 쓰여진다. 굳이 열심히 하는 시도하는 사람들에게 해보니깐 못해먹겠더라 하고 그럼 난 이만! 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3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쓰진 않는다. 실제로 그렇게 강력하게 쓰고 싶어도 그게 창출해내는 이득이 없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원푸트 다이어트 그만해라! 같은 책). 이제는 도전이 도전이 아니라 그냥 삶의 한 부분이 되는 시기다.
6. 이런 여정에 꼭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맨스플레인하는 남자들이다. 이 책에도 재료공학을 전공하고 관련업에 종사한다며 (학사학위를 전문가 인증이라도 되는 냥 다가오는 게 거의 트레이드마크) 플라스틱이 이 인류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 설파하며 유리병이 플라스틱보다 쓰레기로서 나은 점이 뭐냐고 따져오는 사람이 등장한다. 이런 도전기들을 읽어보면서 알게 된 건, 저런 사람들의 등장은 그저 "이 도전에 대한 정보가 충분히 많은 사람들에게 도달했구나"의 마일스톤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구나 였다.
나는 아무래도 산드라의 가족처럼 할 만큼의 의지력도 없거니와, 전적으로 그들의 도전에 동의하진 않는다. 우선 처음부터 온갖 플라스틱을 버리거나 나누면서 시작하는 점은 공감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가능한 옵션은 찾아나서고 플라스틱을 덜 쓰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는 돈을 더 지불할 용의도 있지만, 너무 극단적이면 나는 분명 "억울해할테고" 내가 하는 노력을 다시 0으로 만드는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건 원치 않는다.
이 책에서는 플라스틱 제로나 사용량 줄이기와 관련한 많은 반대의견들이 나오고, 산드라 나름대로의 반박의견이 같이 나온다. 예를 들면, 유럽에서는 그래도 플라스틱 판트 및 분리수거 등으로 재활용이 잘 되고 있는데 굳이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의견에, 맞는 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플라스틱이 생산되도록 하는 공장들이 다 비유럽에 있고 그렇게 유지되는 산업에게 플라스틱을 계속 소모함으로써 주는 긍정적 강화가 있기 때문에 그 연결고리를 끊을 필요가 있다는 대답을 한다. 이런 점이 어떤 도전을 할 때 그 도전의 당위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행동의 결과까지 고려하며 큰 관점에의 내 가치관을 형성해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아마 이게 책 읽기가 주는 큰 즐거움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방향을 건강한 쪽으로 틀고 있던 와중에, 우연찮은 기회에 밀라논나 유튜브 채널의 제로 웨이스트와 서랍정리법을 보여주는 이 영상을 보게 되었다. 이 밀라노 할머니는 물건이 태어났으면 그 수명을 다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고 최대한의 쓸모를 찾아준다. 예를 들면 초콜렛 선물 상자에 있는 플라스틱을 서랍 속에 두어 악세서리 낱개 보관용으로 사용한다든지 (천재 아이디어!), 채소 포장용 플라스틱 박스를 신발 상자로 써서 신발장 정리를 한다든지 (발이 작아서 가능한 일인 거 같아요...) 등이 그런 것들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x6_qoa8ueTc
설명해주실 때마다 "할머니가 궁상이죠?"하는 말을 붙이셔서, 궁상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밀라노 할머니는 궁상이고 산드라는 유난이다. 하지만 둘다 궁상과 유난을 기꺼이 선택했다. 궁상과 유난을 선택하는 비용이 큰 사회들이 있다. 한국이 나한테는 그렇다. 밀라논나 영상 중에 할머니 가방을 공개한 영상이 있는데, 거기서 가끔 카페에 가면 사람들이 티슈를 가져오는데 그게 남으면 버리지 않고 지퍼백에 넣어 보관하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신다고 한다. 나도 한국에 살 때 그랬다 (지금은 그렇게 갈 카페도 없고, 카페 가도 다 커피는 나한테 가져다 주니 내가 티슈를 왕창 뽑을 일이 없다). 점심시간에 그렇게 커피 마시고 들어올 때 남은 티슈를 버리지 않고 가져와 회사 책상 위에 두고 먼지를 닦았다. 그래서 점심에 커피 마시는 날마다 먼지를 닦았다 (=매일매일). 그걸 보고 한 친구는 시니컬하게 "야, 너 부자되겠다"라고 했다. 만약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저 소리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얼마 전에 본 글에서는 패스트푸드점에 와서 제로 콜라를 시키는 사람들을 희화화하며 몰래 일반 콜라를 준다는 농담을 한 사람이 있었다. 유난이 선택이 아니고 유일한 옵션인 당뇨환자들은 "패스트푸드점까지 와서 제로시키는 유난 뭐임"이라는 눈초리를 매번 견뎌야 하는 거니, 유난의 비용에 대해서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빠르게 영역을 확장하면서 이제 우리에게 소비하지 않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은 소비하려고 들이는 노력보다 훨씬 크다. Less is more가 말은 쉽지만 더 어려운 이유다. 먹으려는 노력보다 먹지 않으려는 노력이 더 크고, 버리려는 노력이 사모으려는 노력보다 크다. 이제 나는 저런 유난과 궁상을 선택하고도 남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신경쓰지 않을 만큼 나이도 먹었고 단단해졌고 불필요한 소리들을 잘 차단한 환경을 만들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저 뒤로 잡아끄는 힘들과 싸워이겨내야 한다. 그 분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가능하다면 많은 책들과 이야기들을 보면서 힘을 얻고 더 단단해지기를 바란다. 환경을 생각한다고 예쁜 에코백을 사지 않고, 있는 플라스틱 통을 다 버리고 나무통과 스테인리스통을 사들이지 말고, 그냥 있는 걸 최대한 활용하면서 새로운 걸 살 때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자세 하나로도 이미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온 거니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물론 이 모든 건 내가 나에게 해주는 이야기기도 하다.
어느 순간 마음에 걸리는 게 없어지면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 때가 있다. 그때까지 많이 고민하면서 경험해봤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할 때 부끄럽거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무리해서 할 필요가 없다. 그 마음을 잘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 산드라의 책 중, 딸이 화제가 된 가족의 도전을 인터뷰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계속 같은 질문을 하는 걸 보고 "사람들은 대체 왜 무엇이 가장 어려웠는지를 알고 싶어 할까?"라고 엄마한테 되묻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은 안되는 이유, 그게 무리인 이유를 찾아 편하고 좋은 게 좋은 삶을 이어가고자 한다. 이 책을 옮긴 이는 이런 이야기도 덧붙였다. "옳지만 쉽지 않은 일"이 아니라 "쉽지 않지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바란다고. 방점은 옳은 일에 찍혀야 하지 쉽지 않은 일에 찍히면 안된다고. "내가 한 사람 몫 이상의 것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보다 적게 할 수도 없다"는 마지막 문장도 참 좋았다. 그냥 한 사람의 분량을 제대로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나는 나의 몫을 한 것이고, 딱 내 몫만큼 세상이 나아지거나 혹은 덜 나빠지고 있다.
나름 적용의 의미로, 이번 기간 내내 제일 큰 구매목록인 부엌에서 나한테 정말 필요한 게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다. 슈퍼가 바로 앞에 있는데 냉장고는 꼭 커야 할까도 생각해보고 있고, 평생 관심이 없었던 에너지 등급은 적정한가도 알아보고 있다. 디자인과 가격, 그리고 브랜드가 유일한 요소였던 내 결정체계에 새로운 게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렇게 궁상과 유난을 하나 더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