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진상' 발언에 대하여
"엄마 방금 진상 같았어."
뇌가 잠깐 구동을 멈췄다. 좀 전 있었던 일을 반추했다. 내가 한 행동 중에 과연 '진상'이란 소리를 들을만한 행동이 있었는지.
횡단보도를 건너던 아이가 기프티콘을 쓴다며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편의점을 나온 아이는 빈 손이었다. 기프티콘은 마이쭈 포도맛이었는데 포도맛이 없단다. 함께 들어가 직원에게 맛 교차는 안 되는지 물어봤다. 기프티콘을 찍어본 직원은 원래는 되지 않지만 해주겠다며 처리해 주었다. 이 일을 두고 아이는 나를 진상 같다고 표현한 거였다.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며칠 전 하교하는 아이가 냅따 문자를 해서 목이 아프니 병원에 가야겠다며 얼른 나오라고 징징거렸다. 허겁지겁 나가 병원에 함께 갔더니 이미 접수 마감 팻말이 접수대 위에 떡하니 올려져 있었다. 진료시간은 1시간이나 남았는데 대기실 안에 환자가 한가득이었다.
"혹시 언제쯤까지 와야 접수가 가능할까요?"
그건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대충이라도 마감이 되는 시간이 있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헛걸음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귀찮아 죽겠다는 말투로 매일 다르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시간을 책임지라고 할 것도 아닌데 직원과 눈 한 번 맞추고 대화 같은 대화를 나누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직원의 불친절에 기분이 상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아이가 말했었다. 방금 내가 한 행동이 진상 같았다고. 그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접수 마감이면 그냥 그런가 보다 돌아서면 그만인데, 병원이 거기만 있는 것도 아닌데, 무심한 직원 태도에 한 번 더 말을 보탰으니 누구 눈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편의점 일은 아무리 봐도 진상 소리가 억울했다. 결국 내 덕에 기프티콘을 사용한 아이가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한참 아이를 향해 소리 높여 이건 절대 진상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이건 소비자의 권리라는 설명도 뒤따랐다. 열불 내는 엄마 앞에서 아이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진정성 없는 사과에 더 이상 이야기할 열의마저 식어버렸다.
'꼰대'니 '맘충', '씹선비' 같은 말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자기 검열이 심한 시대다. 과거는 신문과 뉴스가 언론을 독점했으나 이제는 SNS의 발달로 누구라도 언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마녀사냥도 남이 일이 아니고 신상 털리는 것도 현대인의 두려움 중 하나다.
과거 나는 온라인에서 저격글을 보고 심장이 과할 정도로 빨리 뛰는 경험을 했다. 큰일이 났다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다 새하얬다 난리가 아니었다. 나는 익명성을 사랑하는 소심한 현대인 그 자체니까. 그땐 정말 나를 공격하는 정체불명의 회원이 악마처럼 보였다. 정말 알고 싶지 않았다.
저 일이 10년도 더 지났다. 강산이 적어도 두 번은 바뀌었으리라. 무슨 일만 터지면 사람들이 카메라부터 들고 본다. 머리 위에 CCTV도 무섭지만, 내 옆 사람의 폰 카메라는 공포 그 이상이다. 표적이 될까 봐 두려워 우리는 스스로를 엄하게 검열한다. 지금 내가 한 행동이 권리를 넘어선 행동은 아닌지, 진상은 아닌지.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내내 침묵했다. 아이는 일부러 더 틈 없이 내 옆에 앉고 아까보단 훨씬 더 기죽은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화를 풀라고 되풀이했다.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싶었다. 아이한테 그저 '나 진상 아닌데?'라고 했으면 끝날 일이었는데.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믿음에 대해 도전을 받아서였을까? 그것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에게. 그건 내 존재를 거부당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타인의 카메라보다 더 무서운 건 내 옆에 찰싹 붙은 아이의 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