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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섬 Apr 21. 2024

엘베에서 아래층을 만나기 두려워요

나의 이불킥 스토리


며칠 전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내 앞으로 아저씨 한 명이 다가왔다. 그가 먼저 타고 다음에 내가 탔는데, 그가 누른 층수는 12층. 내가 사는 곳은 13층. 가슴이 철렁했다.

일단 우리 집의 바로 아래층이란 사실만으로 나는 긴장하기 충분했다. 아무리 우리 집에서 조심한다고 해도 소음 때문에 불편함을 끼쳤을 수 있고 혹은 다른 집의 소음을 우리 집의 소음으로 오해받을 수 있어서 그랬다.

그러나 이번 긴장의 이유가 층간소음이 아니었다. 다행히 그는 타기 전부터 내릴 때까지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었다. 내 얼굴이 어떤지 어디에 사는지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그가 내렸다. 자연히 나의 눈길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가 왼쪽으로 갈지 아니면 오른쪽으로 갈지에 주목했다. 그는 왼쪽으로 같다. 그것은 바로 나의 집 바로 아래층에 사는 이웃이란 소리였다. 오마이갓!


때는 바야흐로 3주 전, 이웃사촌을 보고 반가움이 아니라 부끄러움에 볼을 발갛게 만드는 일이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나의 러닝이었다. 당시 부쩍 코앞으로 다가온 10km 마라톤을 준비 중이었기에 3km 구간을 평소보다 자주 뛰고 있었다.

3km를 달린 후 쌕쌕 거리며 아파트에 들어섰다. 이때 엘리베이터를 타면 좋지만, 본래 러닝은 뛰기보다 뛴 후가 중요한 편. 적당히 풀어줘야 다리에 알도 안 배기에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그런데 이미 3km를 달리고 온 직후라 13층은 까마득하게 보였다. 힘들어서 그렇겠지만 그 길이 어찌나 길고 무료하게 느껴지던지.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웹소설을 읽는 것. 읽다 보면 힘들 줄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오르게 돼서 내가 자주 써먹는 방법이다.


그렇게 집 앞에 도착했다. 엥? 집 앞에 택배가 2개나 와 있네? 먼저 초인종을 눌렀다. 평소엔 내가 직접 비번을 넣고 들어가지만, 그날은 드물게 초인종을 누른 날이었다. 바로 응답이 없기에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자꾸 에러가 났다. 왜 이러지? 틀릴 리가 없는데? 몇 번을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이 난리통에도 안에서는 열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고 "문 열어!'를 시전 했다. 뒤돌아보면 그건 '야수'같은 행동이었다.

들어갈 길이 막막해진 나는 택배로 다가갔다. 어? 뭐야? 이름이 다른데? 우리 집께 아니잖아? 아래층 택배를 아저씨가 잘못 두고 간 모양이었다. 그러실 수도 있다 싶으면서도 좀 귀찮게 느껴졌다. 다시 문을 두드리고 열라고 고함을 쳤다. 두 번째 택배도 아래층 물건이었다. 아니 이 아저씨가?


그때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설마? 아저씨가 택배를 2개나 실수했다고? 내 목이 기름칠하지 못한 기계처럼 끼기긱 돌아갔다. 익숙한 현관문의 명패로 시선이 올라갔다. 호수는 익숙하지 않았다. 우리 집이 아니었다. 아래층이었다. 드물게 더 올라가서 내려온 적은 있어도 덜 올라간 건 처음이었다.

어이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만지면 안 되는 걸 손댄 것처럼 화들짝 놀라 택배를 내려놓고 후다닥 계단을 올랐다. 술에 취해서 남의 집 비번을 마구 눌렀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맨 정신에 이랬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날은 저녁시간이었고 안에 사람이 없기는 힘들었을 것 같은데, 이 모든 소란을 아래층 이웃이 모두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그 뒤로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12층 사람을 보면 아랫집인지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딱 한 번 그 집 아줌마를 마주친 적이 있는데 얼굴을 못 보겠더라. 너무 죄송하고 민망해서 사과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이가 까불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 있다.

"흥분을 가라앉혀라. 사람은 기분이 좋을 때 실수를 하기 쉬운 법이다."


그때마다 아이가 나를 비웃는다. 몇 년 전 아이와 부산 동해선을 타고 기장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그때 우동집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때 정원에 나룻배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나룻배에 홀딱 올라탄 나는 신나게 노를 젓는 시늉을 했고 뭐가 어떻게 됐는지 배의 깃대가 넘어지면서 다른 아줌마의 머리를 콩 때렸다. 어익후! 그때 그 아줌마와 아이의 대화를 딸은 한 번씩 되뇐다.

"엄마 왜 그래?"

"어, 저 아줌마가 나를 때리셨어."

참으로 당혹스러운 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아이는 나를 놀려 먹으려고 가끔 저렇게 나의 이불킥을 들추어낸다.


김성중 작가의 <국경시장>을 읽었다. 정체불명의 시장에서 기억을 판다는 아이디어 때문에 <이터널 선샤인>이, 탐욕으로 자신을 잃어간다는 점 때문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생각나는 소설이었다.

여기서 주코는 지루했던 시간을 팔아치우고 로나는 슬펐던 시간을 팔며 탐닉의 시간에 중독되어 간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과연 어떤 기억을 팔지, 기억을 판 돈으로 무얼 살지 고민했다.

그 환상의 공간, 만월이 뜬 국경시장에 들어선 나를 상상한다. 까불다 아줌마를 깃대로 때린 일이나 아래층에 돌이킬 수 없는 행패를 부린 그 기억이라면 팔아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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