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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배달기사는 왜 허리 숙여 사과해야 했나

by 은섬

그날은 잔꾀를 부려 저녁밥을 배달시키기로 했다. 고른 메뉴는 비조리 상태로 오기 때문에 나는 평소보다 이르게 주문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배달이 완료됐다는 알림이 떴다. 밖에 나가보니 현관 앞이 휑했다. 다른 배달 받으시려고 완료를 일찍 누르셨나? 그런데 시간이 더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배민 고객센터와 채팅을 하고 얼마 후 해당 음식점에서 전화가 왔다. 근처에 배달기사님이 있으셔서 가보신다고, 급하시면 음식을 다시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기사님을 기다려보겠노라 대답했다. 언제 오나 목만 빼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그냥 두고 가면 좋으련만.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현관문을 열자 음식을 품에 안은기사님이 보였다. 역시 엉뚱한 데로 갔구나. 다음 순간 나는 기사님의 얼굴을 보고 움찔했다. 그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60대?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허리 숙여 사과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고 실제로도 괜찮았다. 손님이 와서 대접하려는 것도 아니고 얼른 먹고 나가봐야 하는 사정도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는 나를 '사모님'이라 지칭하며 허리를 90도도 넘게 굽히며 여러 번 사과했다. 무안했다. 이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질렀나? 사실 나이와 상황을 고려하면 ‘오늘이 이 분의 배달 첫 날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의 실수가 안타깝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허리를 굽힌 채였고 나는 음식을 받고 쫓기듯 문을 닫았다.


얼마 전 은유 작가의 북토크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작가님의 기고글 ‘페인트 눈물’은 아파트 도색공을 집 안에서 바라본 경험을 담고 있었다. 사회자는 그 시선을 ‘윤리’로 지칭했지만, 나는 단박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에게 그것은 윤리가 아니라 불편함이었다.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직면했다면, 분명 다른 공간으로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그리고 배달기사의 사과 앞에서 내가 느낀 무안함은, 그 상상 속 불편함의 감각으로 나를 되돌려 보냈다.


그것들은 모두 내가 ‘타인의 노동에 직면하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대부분의 배달은 문 밖에서 조용히 이뤄졌고, 아파트의 도색도 내가 외출한 사이에 끝나 있었다. 그들의 노동이 내 일상 안에서 가시화되는 순간, 나와 그들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위계’가 선명해지며 불쾌한 감정을 자아냈다.


무엇이 그 배달 기사로 하여금 허리 굽혀 사과를 하게 했을까? 우리를 편하게 해주는 배달 시스템일 것이다. 평점을 낮게 받거나 클레임이 들어오면 다음 배달을 잡는데 불이익을 부여하는. 푸코가 말한 ‘규율 권력’은 타인의 시선 없이도 스스로를 감시하고 통제하게 만드는 힘이다. 후기와 평점은 그 대표적인 현대적 형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그 보이지 않는 평가에 복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동료에게 했을 때 그녀는 구조의 문제를 부인하진 않았지만, 그의 태도가 학습에 의한 결과일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이미 수차례 진상 고객을 마주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몸을 낮추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란 것을 체화한 결과는 아니었을까? 그 결과로 그야말로 알아서 기는 거라면? 그러나 이는 그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고객들 위에 세워졌을 게 분명하다. 일리 있는 주장 덕분에 사고가 더 풍성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럴수록 이 마음을 외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의 처세술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있나. 그의 과잉사과는 고객이, 제도가 또 사회가 강요한 무기력한 복종은 아닐까? 만약 제도 안에 그를 보호하고 그의 존엄을 지켜줄 장치가 있었다면 그것은 배우지 않아도 될 해결책이었다. 그리고 그런 강요는 우리조차 비껴가지 않는다.


다시 문제는 제도로 귀결된다. 이 정도면 과연 개인과 구조의 문제로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어진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논할 때 쉽게 개인과 제도의 탓으로 나누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개인은 제도 속에서 길들여지고, 제도는 개인들의 태도와 선택 위에 세워진다. 이 둘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플에서 맛있게 드셨다면 후기를 남겨달란 알람이 왔다. 배달 앱의 후기는 배달과 음식에 대한 2가지 리뷰가 가능하다. 분명 이날의 배달은 스마일 표시를 받기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그날 어떤 후기도 남기지 않았다. 과거라면 불편함에 대한 회피로 인한 침묵이었겠지만, 이번은 평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내 의견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와 같은 고객이 할 수 있는 작은 연대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만약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사과하는 배달기사에게 음료를 건네는 건 어떨까? 급히 문을 닫지 않고, ‘괜찮아요’란 말로만 끝내지 않는 마무리. 그것은 평가 대신 안심, 침묵 대신 작은 연대, 그에게 줄 수 있는 나의 가장 따뜻한 응답이 될 것이다.



Image by Kai Pilg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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