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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써도 될까요?

by 은섬


며칠 전, 과거 글쓰기 수업에서 만났던 대정 님에게 연락이 왔다. 잘 지냈냐는 흔한 안부말에 그녀는 잘 지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털어놓은 이야기가 의외였다. 지난해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다는 소리를 참 덤덤히도 했다. 그제야 일전에 그녀가 보낸 긴 장문의 카톡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논의 수확률을 높여줘 ‘녹비(綠肥)’라 불리던 자운영을 보러 창녕 우포늪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 보라색 융단 앞에서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웠다고 했다. ‘소풍’을 끝내기 전이라 다행이라던 말이 그런 의미였구나! 이후 듣게 된 그녀의 투병 이야기도 나의 상상이 닿지 못할 새로운 세계였다. 이야기를 전하던 대정 님은 “언젠가 당신의 글이 이 이야기를 데려가줄 수도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그것들이 언제 내 글의 재료가 될지 알 수 없으나 마음의 울림이 이토록 선명한 것을 보면 분명 글이 되고 책이 되어 세상에 나올 일이 그리 먼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경험이 글로 남는 것에 거는 그녀의 조용한 기대에 보답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나는 어떤 경계에 선 기분이 느낀다. 이 이야기를 써도 될까? 이 사람의 고통과 기억을, 나의 방식으로 풀어도 괜찮을까?


나에게는 이런 경계의 순간이 자주 찾아온다. 어떤 때는 SNS에서 본 얼굴 모르는 이의 글이, 어떤 때는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가 자꾸만 내 마음을 두드린다. 심지어 그것은 나를 따라오고, 나를 자극하고, 종내에는 글을 쓰게 만든다. 친구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여러 요소들을 바꾸고 결말도 내 식으로 상상했다. 조심스레 그 글을 친구에게 보여주니 “내 이야기가 소설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라고 말하는데 조금 감동한 것처럼 보였다. 반면 지인은 직장 동료의 사연으로 글을 써 뿌듯한 마음으로 상대에게 보여준 경험을 내게 공유했다. 상대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아 아차 싶었단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그럼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써도 되는 걸까?


과거 '저작권'이라는 말은 나와는 무관한 딱딱한 말로 들렸다. 그러나 요즘은 점점 더 피부에 와닿는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연애 경험을 노래로 만들었다 전 애인으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요구받았다는 건 팝가수의 이야기는 루머일까? 팩트일까? 이미상 작가의 소설집 ‘이중 작가 초롱’에는 책 속 이야기가 자신의 경험이라며 작가를 괴롭히는 스토커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것들이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 불안은 단지 법적인 책임 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질문, “이 이야기가 정말 내 것이 맞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떠오르기 때문이다. 타인의 경험이 나의 창작이 되는 순간, 나는 위태로운 경계 위에 서는 셈이다.


게다가 나에게는 청소년 자녀가 있다. 영상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요즘 아이들은 초상권에는 나름대로 익숙해져 있지만, 저작권 개념에는 무지한 것이 현실이다. 오늘 아침 아이가 자기가 만든 영상이 좋아요를 많이 받았다며 보여줬다. 그것은 아이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의 장면을 편집해서 음악을 덧입힌 영상이었다. 이래도 괜찮은 거냐고 물으니, “다들 이렇게 해”라며 태연하게 말했다. 순간 헷갈렸다. 그 영상은 창작일까, 침해일까. 아이들에겐 그저 ‘편집’이고 ‘재미’이지만, 어른이 보기엔 분명히 아슬아슬한 지점이다.


어른인 나도 글을 쓸 때마다 참고한 그 이야기가 진짜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한다. 무료 폰트를 쓸 때도 “책을 내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어 라이선스를 꼼꼼히 체크한다. “무료 폰트로 출판해도 잘못하면 합의금 연락이 온다더라”는 괴담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경계조차 알지 못한다. 이건 내 아이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이제야 저작권이란 개념을 ‘법’이 아니라 ‘관계’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빌릴 때, 그 이야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다시 살아내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아 가고 있다. 그 사람의 감정을 함부로 외면하지 않고, 나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소화시켜 나만의 언어로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그 경계는 늘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그 아슬아슬함을 통과한 다음에야 누군가의 이야기가 진짜 ‘내 것’이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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