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ajority
[D-2]
아침에 눈을 뜨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마 지금 많은 이들이 이 비가 혹 노아의 방주를 위한 전주곡은 아닐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지긋지긋하고 때론 무덤덤한 두려움의 나날들을 2일 후면 끝낼 수 있다.
지구의 입장에서 본다면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는지는 전혀 중요치 않을 것이다. 자연은 과거부터 그래왔다. 강한 생명체가 살아남고 생존에 유리한 방식이 다음 세대로 전달됐다. 자연선택. 나는 사람들에 의해 또 자연에 의해 선택받지 못했으므로 지구에서 사라진다.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남아 있던 욕구 한 줌이 소리없이 사라졌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타인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숭고하다. 그러나 희생을 해주면 고마운 것이지 강요당하는 순간 그것은 희생이 아니어진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지구 상황도 다수의 의견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결과는 최대가 행복한 상황이 아니란 것을 사람들은 잊고 있었다.
[D-1]
그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지만 마음이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놀랐다. 한번씩 왜 나여야 하는지 억울한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어차피 죽을텐데 이런 제도를 만든 인간들을 죽이고 같이 죽으면 어떨지 상상도 해봤다. 어차피 인구가 줄어들어야 하니 잘했다고 동상이라도 세워주려나? 현실은 현자 계급을 살해한 댓가로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 현장 사살될 것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자기 손바닥 만큼도 남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괜찮다면 꽤 괜찮았다.
마지막으로 집안을 살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거실 한쪽 벽에 키를 표시해둔 흔적이었다. 부모님의 성격을 보여주듯 그 표시는 일목요연해서 나의 키 성장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옆으론 여동생의 것도 있었는데, 나와 달리 귀여운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었다.
한때 어머니가 공들여 키웠으나 이젠 다 말라버린 초록이들, 나와 여동생의 모습이 담긴 많은 사진 액자들. 사고일 아침 아버지가 테이블에 펼쳐놓은 책도 차마 손대지 못한채 그날 그대로였다. 뜰을 내다보자 여름날 고무 대야를 내어놓고 목욕을 하던 오누이가 보였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물을 뿌려대며 깔깔 웃었다. 이런 장난을 치기엔 스스로 너무 자존심이 상한다고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던 나에게까지 전염되던 유쾌한 웃음이었다.
한동안 음식을 해먹은 흔적이 없는 주방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문득 나는 어머니가 해주시던 수제비가 너무 먹고 싶었다. 내일 당장 죽는데, 수제비 한 그릇이 무슨 대수일까 싶지만, 그걸 못 먹으면 내일 눈을 못감을 것 같았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레시피 수첩을 참고했지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국물은 멀갰고 밀가루 덩어리들이 엉망으로 엉겨 있었다. 나는 힘들게 끓인 수제비를 냄비채 씽크대에 쏟아 버렸다. 씽크대에 수제비 국물이 잔뜩 튀어 말라붙기 시작했다.
[D-day]
얼마전까지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일 것처럼 굴었던 것이 철없던 시절이 객기처럼 느껴졌다. 지금껏 나는 죽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다시 살고 싶어지게 할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하나 남은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를 들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살피고, 어머니의 따뜻함을 떠올리고, 여동생의 웃음소리를 기억했다. 사진 속의 나는 잔뜩 골이 나있었다. 액자의 뒤를 풀어 가족사진을 꺼냈다. 사진 뒷면엔 써진 어머니의 필체에서 한 글씨마다 꾹꾹 눌러쓴 신중함이 느껴졌다.
선우가 우리 족이 된 날 / 넌 우리 가족이 될 유일한 단 한 사람.
그제서야 나는 기억이 났다. 그날은 내가 우리 가족에 입양이 된 날이었다. 나는 이전에 몇 번의 파양을 경험했기에 이번엔 절대 상처받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고 마음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었다. 그 결과가 사진 속의 부루퉁한 내 모습이고.
그 사진을 가슴에 꼭 안고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하던 옷장 문을 열었다. 커버린 몸을 잔뜩 구겨야 겨우 옷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조심스레 옷장 문을 닫자 눈을 떠도 감아도 눈앞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눈을 감고 가족을 생각하자 꽉 낀 몸이 가족의 품처럼 느껴져 마음이 편안해졌다. 누군가에겐 버림받았을지 몰랐지만 나는 가족에게 선택받은 유일한 단 한 사람이었다.
10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리고, 그와 동시에 현관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조심성 없이 바닥을 딛는 구두 발소리가 울리고 잠시 후 옷장문이 벌컥 열렸다. 눈으로 쏟아지는 빛이 너무 눈부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치직치직
“수리부엉이, 현장 정리 완료됐나?”
“Clear, Roger!”
무전기 소음이 잠잠해지자 구두를 신은 사람 하나가 헬맷을 벗어 옆구리에 꼈다. 그러자 그 안에 갈무리됐던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미끄러져 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주워 들은 사람이 집 밖으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탁! 혜윤이 달걀을 꺼내들자 냉장고 문이 소리나게 닫혔다. 냉장고 표면엔 마그넷으로 고정된 사진들이 빼곡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곳에 부루퉁한 남자 아이가 포함된 가족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은 누군가 꼭 쥐고 있었던 것처럼 구겨져 있었고 군화 발자국까지 묻어 있었다.
싱크대 모서리에 부딪히는 달걀에서 느른하게 점액질 물질이 새어 나왔다. 뜨겁게 달궈진 후라이팬에 쏟아진 달걀은 치익 소리를 내며 응고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달걀 후라이를 하던 혜윤은 급작스레 달걀 냄새가 비려 미간을 찌푸렸다.
혜윤은 1등급을 받으며 인구감소 로또에서 제외되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등급은 단지 신체적으로 우월하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유전적으로 결함이 없고 부모의 직업과 환경, 본인의 지능과 인성 등 많은 조건을 따져 부체 또는 모체로서 부족함이 없어야 받을 수 있다. 인구감소 로또에서의 제외에 부과되는 의무는 사회 구성원의 생산이었다. 그러나 혜윤은 가능한 아이를 갖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물론 그건 그녀만의 비밀이었다.
인구 문제는 지구에게 과거부터 중요한 문제였다. 어느 때는 인구가 너무 많아 출산을 제한해야 했고, 또 어느 때는 인구가 감소할 판이라 더 낳으라고 권장했다고 한다. 그런 사태의 원인은 항상 개인의 문제였다. 그러나 모든 모체는 알고 있었다. 지금이 새 생명체를 낳기 적정한 때가 아니란 것을. 그것은 배워서 아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어떤 감각이었다. 진화의 단계를 거친 인간이지만 그건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동물적 본능인지도 몰랐다. 내재된 자연선택의 본능 또는 따르고야 마는 자연의 명령 같은 것. 이런 생각은 인구감소 로또의 당첨자들을 처리하는 군인을 맡은 후 더 강해졌다. 음식에서 나는 비린내는 갈수록 더 강해졌다.
본래도 육식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혜윤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자신이 채식주의자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점점 냄새에 민감해지는 자신을 또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구워진 소고기 한 점을 입 안에 넣었을 때 혀를 침식시키는 누린내, 돼지고기가 익어가며 뿜어내는 날 것의 냄새들이 그렇게 역할 수가 없었다.
육식을 줄이겠다는 것, 나아가 끊겠다는 것은 혜윤에게 선택 이전의 문제였다. 육식에서 느껴지는 야만의 냄새가 그녀를 질리게 했다. 육식으로 생명을 해쳤다는 죄책감이 가슴에 체증처럼 남겨졌다. 그것은 사라질 수 없는 부채감이었다. 결국 그런 혜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채식 밖에 남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현실처럼 분명하게 느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