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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친애하는 나의 스토커님에게

by 은섬


시작은 커피 한 잔이었다. 도서관 내 자신의 자리 위에 놓인 커피 한 잔을 발견했을 때 다름은 자신이 남의 자리에 앉은 건 아닌지 고개까지 빼내어 여러 번 확인했다. 도서관에서 사랑이 꽃핀다는 이야기는 심심치않게 들어봤지만 그게 자신의 이야기가 될 줄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연락처 적힌 메모라도 있겠거니 커피의 바닥까지 훑어봤지만 없었다. ‘아쉽네’ 라고 생각하고 커피를 한 모금 쪽 빨았을 때 다름의 눈이 1.5배쯤 커졌다. 너무 맛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네 자리에 있었단 말이지?”

탐정모드가 된 주은이 커피잔이 대단한 증거라도 되는 듯 진지하게 들여다봤다. 그 커피잔은 다름이나 주은이 자주 가는 중앙도서관이나 단대 내 카페의 잔은 아니었다. 잔을 들었다 놨다 하는 주은이 아까부터 말이 없는 나우의 옆구리를 한 대 치며 물었다.

“이나우, 넌 뭐 아는 거 없고?”


다름 역시 기대에 찬 시선으로 나우를 쳐다봤지만 곱슬한 앞머리가 이마를 잔뜩 가린 그는 표정 변화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김이 새는 걸 말릴 도리가 없었다. 구름 위라도 걷는 듯 붕 뜬 마음이 급작스레 푹 식는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갑자기 주은이 커피잔을 성배라도 되는냥 두 손으로 높이 쳐들고 외쳤다.

“예술대!”

깨달음을 얻은 주은의 말에 의하면 이 커피잔은 예술대 건물에 있는 카페의 것으로 그곳은 학교 내 최고의 커피 맛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이로써 다름의 ‘문제적 그’는 예술대 소속인 것으로 잠정 결론지어졌다. 그때만 해도 이것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은 시작의 징조였다.


“다름아, 쫌... 주은아, 다름이 좀 말려봐.”

엉거주춤 횡단보도 앞에 선 나우가 다름이와 주은이의 옷 끝을 겨우 잡고 안절부절했다. 그런 나우에게 주은이 손등 뒤로 입모양을 가린채 빠르게 속삭였다.

“야, 쟤 한 번 삘 받으면 못말려. 그냥 좀 맞춰주지.”

잠시 후 8차선 횡단보도에 초록색 불이 들어오고 신호가 바뀌었음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신호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발이 망설임없이 차도로 내딛어졌다. 그때 다름의 폰에서 음악 어플이 실행되고 음량이 최대치로 올라갔다. 폰에서 아이돌 The Boys의 ‘Thrill Ride’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쏟아져 나왔다.


일렬로 선 다름, 주은, 나우가 팔을 쭉 뻣으며 다리를 박차고 나섰다. 이후 바운스를 타고 있는 몸이 느릿하게 웨이브를 했다. 전화를 받는 듯한 손과 팔의 동작도 이어졌다. 팔을 사선으로 뻗어 옆으로 이동하는 듯 하다가 다리를 벌려 골반을 돌리고 일렬로 서서 팔, 다리를 까딱이며 옆으로 이동했다. 같이 횡단보도를 걷던 이들이 이 모습을 재밌어하며 지나갔다. 초록 가로수들이 일렬로 늘어선 봄의 대로에 펼쳐지기 좋은 모습이었다.

다름은 흥이 올라 얼굴이 발갰고, 무심한 태도와 다르게 각 잡힌 춤을 보여주는 주은은 숨 한 번 거칠어지는 법이 없었다. 반면 다름에 비하면 머리 하나 정도는 큰 나우는 너무 부끄러워 오히려 얼굴이 새하얬다. 대학 입학 후 다름은 흔히 있는 뒤풀이 장소에서 우연히 주은과 옆자리에 앉았고 그 일을 계기로 둘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주은이 나우를 데려왔고 셋은 서로 달랐지만 그래서 더 무던하게 어울렸다.


“꺄~ 신난다! 좋은 춤이었어. 그럼 수고!”

다름은 역시 춤은 함께 춰야 제맛이라고 생각하며 알바 장소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지금 가면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것이다. 남겨진 흥에 들썩거리는 뒷모습. 그리고 주은과 나우가 덩그라니 횡단보도 앞에 남았다. 그때 주은이 나우 뒷덜미를 잡아 끌며 근처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낮에는 파스타 전문점이었다가 밤에는 펍으로 변하는 ‘그레타’는 제법 유명세가 있는 곳이었다. 주황색 벽돌을 쌓아 지은 2층 건물 밖으론 꽃과 과실수가 심어진 작은 정원도 있어 분위기가 괜찮았다. 대학가 주변 저렴한 술집들에 비하면 조금 가격이 있긴 했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낮엔 소개팅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었고, 밤엔 분위기 있는 곳에서 술을 마시고 싶은 학생들로 복작대는 곳이었다.

그레타 스탭인 다름은 오늘도 양손에 2,000cc 맥주를 들고 이층으로 올랐다. 첨엔 손목이 끊어질 듯 아프고 맥주가 쏟아질 듯 위태로웠지만 이젠 익숙해진 몸놀림이었다. 남자 셋이 모인 구석의 테이블에선 처음부터 생맥 4,000cc를 주문했다. 다름이 다가가자 남자들이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까딱 들어 그녀를 살폈다. 시선으로 몸을 훑어내리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그 뒤로는 자잘한 심부름이 이어졌다. 티슈를 더 달라든가 포크가 바닥에 떨어졌다던가 그런 사소한 것들.


물컵을 달라는 심부름에 다름이 다가가자 친구들이 쭈뼛쭈볏 서있던 남자를 다름쪽으로 밀었다. 갑작스럽게 밀린 남자는 다름에게까지 부딪혀 왔는데 무리가 그 모습에 낄낄거렸다. 부딪힌 남자는 어쩔 바를 모르며 자리에 앉으려 했지만 다른 친구들이 그를 부추겼다. 펍에서 일하다보니 간혹 연락을 달라는 쪽지를 받는 경우는 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부딪혀오는 경우는 처음이어서 다름은 잠깐 당황했다.

잠시 후 일행이 담배를 피러 밖으로 나가는 것 같아 다름은 마음을 놓았다. 테이블의 빈 그릇을 치우며 창문 너머로 흔히들 손님들이 담배를 피우는 골목 안쪽을 내려다 보았다. 잠시 후 큰 키에 넓은 어깨, 캡모자를 쓰고 그 위에 후드를 뒤집어 쓴 사람이 일행 중 하나를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후드남이 웬지 조금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어 목을 빼고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지? 싸움난건가?”

다름은 재빨리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남겨진 남자들의 소지품을 챙겨 1층으로 내렸다. 아까 다름에게 부딪힌 남자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2층으로 오르려다 다름에게서 소지품들을 받아갔다.

“아깐 죄송했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남자도 빠르게 계산을 하더니 어두운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어찌됐든 다름은 저들의 밤이 안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남다름, 근데 그때 왜 그랬어? 개강총회때...”

침대에 등을 기대고 함께 넷플릭스를 보던 주은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다름에게 물었다. 아마도 주은이 말한 때는 둘이 처음 만났던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일게다. 그날 주은이 마셔야 했던 폭탄주를 대신 마신 사람이 다름이니까.


일종의 기싸움이었다. 신입생 중에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후배의 기를 꺽어서 선배들이 다시 상황을 틀어쥐겠다는. 굉장히 고전적이고 효율적인 수법이었지만 비열한 수법이기도 했다. 주은은 평소 술이 셌지만, 그날은 이미 많은 술을 마셨고, 마지막 폭탄주를 보는 순간 저걸 마시면 일이 나겠구나 싶었다. 좌중의 모두가 주은의 다음 행동을 주시하며 분위기가 쨍 얼어붙었다.


긴장을 깬 건 주은의 옆에 앉아 있던 다름이었다. 주은 앞에 놓여진 폭탄주를 태연하게 가져가더니 겁 없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잔이 테이블 위로 놓이기가 무섭게 다름도 풀썩 쓰러졌다. 말릴 새 없이 일어난 일이었지만 주은은 본능적으로 쓰러지는 다름을 품에 앉았다. 품 안에 쏙 안기는 몸체가 너무 가냘퍼 좀전에 그 뜨거운 폭탄주가 이 몸안으로 들어간 건가 현실감이 없었다.


“너 술도 약하잖아? 근데 그때 왜 겁도 없이 왜 폭탄주 마셨냐고?”

그때를 떠올리듯 먼 곳을 바라다보던 다름이 주은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 자리 너무 불편했잖아.”


다름은 누군가 불편한 게 싫었다. 공감성수치랑 비슷한 건가? 비록 친분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슬아슬한 그런 분위기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상상만으로도 불편해서 소름이라도 돋은 것 같아서 마구 팔을 쓸어 내렸다. 사실 딱히 누군가를 돕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그런 불편함을 못참아서 하는 행동이니 솔직히 이기적인 이유가 맞다. 뭐 그런 행동으로 부차적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다면 그건 보너스 같은 거고.


그 일 뒤로 남다름은 몇 번 더 술자리의 폭탄주를 마시고 쓰러졌다. 그런 다름을 옮기는 일은 주은의 몫이었는데, 다행인 것은 술자리에는 절대 오지 않으면서 전화만 하면 어디선가 쪼르르 이나우가 와서 도와준다는 거였다. 쓰러지는 다름의 소문이 소소히 퍼지자 술을 무리하게 권한 선배들에 대한 질타가 있었고 신입생 ‘남다름’은 ‘남코’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남다름 싸이코’의 준말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둘이 함께 파스타를 먹으러 갔을 때였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다름이 뒤이어 들어온 아이들을 유심히 쳐다봤다. 행색이 좋지 못한 아이들은 어색하게 파스타집으로 들어와 쭈뼛거리며 겨우 자리를 잡았다. 식사가 끝나 주은과 다름이 일어서 계산을 할 때였다.


다름이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며 조심스럽게 아이들 테이블을 가르켰다.

“저 테이블에 파스타 하나 더 넣어주시구요, 계산은 이거로 같이 해주세요.”

처음 겪는 엉뚱한 일에 직원이 눈을 말똥말똥 떴다. 왜 그걸 니가 내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어린이는 우리의 희망이니까?”


파스타집을 나서자마자 주은이 다름에게 물었었다.

“방금 뭔데?”

“그런 거 있잖아~ 바에서 갑작스레 근사한 칵테일 한 잔이 오는 거야. 주문한 적도 없는데? 바텐더가 한 쪽을 가르키자 멋진 신사가 눈을 찡긋 하면서 자신의 잔을 들어올리는 거지.”

다름은 파스타면을 돌돌 마는 시늉을 하더니 그 손을 들어보이며 찡긋 윙크를 했다.

아~ 역시 남코. 선행인 것 같은데 묘하게 똘끼가 느껴진다.


(두번째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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