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은 이후에도 도서관에서 자신의 자리에 놓인 커피를 발견하곤 했다. 매번 마실 적마다 눈이 번쩍 뜨이는 그 맛있는 커피를. 언젠가 연락처를 주겠거니 싶어서 그녀는 안달하지 않고 그 커피를 달게 마셨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커피는 또다른 달콤함으로 몸집을 불려나갔다. 그녀의 사물함에 작은 종이가방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안엔 드링킹 요구르트 사과맛, 곰젤리, 자두나 청포도맛 사탕이 들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다름이 좋아하는 간식들이었다. 그 모양새가 꼭 마니또 같은 호감이어서 다름은 기분이 달달하게 좋았다.
그런데 어느날 집 현관문에 종이가방이 걸려 있을 땐 조금 흠칫했다. 반듯하게 접힌 가방 안엔 얼마전 거리에서 다름이 눈여겨보던 팔찌가 담겨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곰젤리도 한봉지 들어 있었다. 학교에서의 마니또와 동일한 사람이라는 표시였다. 놀라운 것은 거리에서 그녀가 본 팔찌는 카피 디자인이었는지 가방 속의 그것은 디자인은 동일하되 꽤 알려진 쥬얼리 브랜드의 것이었다. 그 팔찌를 팔에 대보지도 못한채 다름은 멍해졌다.
‘뭐지? 설마 이거 스토커인가?’
그 뒤로 스토커는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아침마다 다름의 폰으로 메시지가 들어왔다. 오늘 아침 들어온 메시지는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김행숙 시인의 ‘다정함의 세계’란 시의 한 구절이라는 걸 시간이 얼마 지나 알게 되었다. 그는 감성이 남다른 인문학적 스토커인 모양이었다.
때로 메시지는 매우 절실했다. ‘나의 절망 끝에 결국 내가 널 찾았음을 잊지마. 넌 절벽 끝에 서 있던 내 마지막 이유야.’ 라는 구절은 본인의 이야기인지 SNS에 올라온 것인지 몰랐다. 그럼에도 상대를 스토커로 인식하자 그 메시지가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물론 메시지를 보내온 전화번호로 메시지를 보내보고 전화도 걸어봤다. 답 메시지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고, 당연히 전화를 걸 땐 폰이 꺼져있었다. 마음 같아선 폰의 명의자를 찾아내고 싶었지만, 경찰의 개입이 없인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학교와 집까지 알고 있었지만, 어떤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기에 경찰의 대응이 뜨뜻 미지근할 것이다. 아직까진 어떤 피해도 위협도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일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다름에게 좋은 일들이 연이어 생겨났다. 주은, 나우와 함께 학교 잔디밭에서 놀고 있을 때였다. 다름은 얼마전부터 노트북을 구입할까 고심중이었다. 도서관 멀티미디어실이나 PC방에서 컴퓨터 작업하는 일은 꽤나 번거로웠고 집의 데스크탑은 영 효율이 떨어졌다. 그래서 당근마켓에 노트북 키워드 알림을 해놓았다. 조금 저렴한 중고를 구입한다면 부모님께 손을 벌리지 않고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야야야~ 이거 봐봐. 그램 360이 50만원이면 거져 아니냐?”
한가롭게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던 주은과 나우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다름의 스마트폰 화면을 쳐다보았다.
“미친! 말도 안되는데? 얼른 채팅 고고!”
채팅창을 연 다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램이 이 가격일 리가 없었다. 대충 보니 오래 사용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사기가 아닐까? 물품 사진 한 장도 없고, 다른 판매물품도 없었다.
“근데 너무 이상해. 사기 아닐까?”
그 소리에 주은과 나우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다른 물품을 보려고 할 때 주은이 슬쩍 말을 건넸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채팅 걸어보라고, 어차피 선입금도 없다면 한 번 보고 결정해도 되지 않냐고. 혹시 모르니 같이 가주겠단 말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다름은 어느 낯선 오피스텔 앞에 서게 되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상대가 가르쳐준 비밀번호로 공용현관을 열고 들어가면서 상대의 무신경함에 뜨악했다. 자기가 나쁜 맘이라도 먹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비번을 가르쳐주나 싶었다. 오지랖이 넓은건지 모르겠지만 상대에게 주의를 줘야겠단 사명감까지 들었다. 비싼 노트북을 이렇게 헐값에 넘기는 그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말해준 집 앞에 서자 깨끗한 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노트북이 보였다.
결과적으로 다름은 득템을 했다. 몇 십만원을 더 붙여 팔아도 얼마든지 팔릴 새 것에 가까운 노트북을 헐값에 구입했다니 스스로도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 정도면 득템도 아니고 심봤다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다름은 판매자에게 공용현관 비번을 알려주는 건 매우 위험한 일임을 강조했다.
잠시 후 오피스텔의 현관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다름이 탄 엘리베이터는 이미 1층으로 내려간 후였다. 현관 앞 상자를 치우던 그는 그때 폰으로 들어오는 당근마켓의 채팅창을 확인했다.
“판매해주신 그램은 너무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혹시라도 너무 싸게 판 거 아닌가 후회되어 잠이 오지 않는다면 3일 내로 연락주세요. 맛있는 밥 한끼 대접하겠습니다. "
"그리고 앞으론 절대 절대 공용현관 비번 같은 거 알려주시면 안돼요.
요즘처럼 무서운 세상에 큰일 납니다.
지금 바로 바꾸세요. 제가 다시 와서 확인해볼꺼에요.”
남자가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폰에서 익숙한 번호를 꺼내 문자 하나를 작성하고 발송 버튼을 눌렀다.
“누군가에게 시간을 들인다는 건 다시는 돌려받지 못할 삶의 일부를 주는 거야. 목적이 뭐든 간에.”
돌아가던 다름의 폰에 띠링 문자 알림음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대한대학교 사회과학부 1학년 남다름입니다.”
다름은 카페에서 만난 여학생에게 자신의 소개를 했다. 별 이변이 없다면 이제 가르치게 될 과외 학생인 이효주였다. 효주는 올해 고2 학생이었는데, 다름은 나우를 통해 이 자리를 소개받았다. 다름은 나우가 이 좋은 자리를 왜 자신에게 양보하는지, 또 효주와 나우는 무슨 사이인지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이렇듯 티나지 않게 자신을 챙겨주는 나우가 고마웠다.
효주가 한눈에 의욕에 불타는 모습이 뻔한 다름을 보고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언니는 듣던대로네요.”
또다. 도대체 ‘듣던대로’는 무엇인지, 나우가 다름을 어떻게 소개한건지 궁금함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런 궁금증을 뒤로 하고 다름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효주의 현재 진도를 확인하고 보완해야 할 점을 찾아 수업 계획을 짜려는데, 효주가 다름의 손을 잡아왔다. 효주가 말하는 내용은 생뚱맞았다.
자신은 학업 성적이 뛰어나 과외가 필요없단다. 오히려 높은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가 상당하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카페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수다나 떨면 된다고. 첫만남을 집이 아닌 카페에서 만나자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나보다. 있는 집 아이들은 고작 이런 일에 몇 십만원을 쓰나?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효주의 스트레스를 낮춰주고 미래에 도움이 될 얘기들을 많이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좋은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며 다름은 스토커에 대한 경계가 많이 무뎌졌다. 그래서 아르바이트가 늦게 끝나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 등 뒤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를 한참 신경쓰지 못했다. 새로 시작한 과외는 ‘그레타’에서 하는 아르바이트보다 시간도 덜 빼앗기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에너지 소모가 현저하게 적었다. 둘을 비교한다면 과외를 하게 된 이상 굳이 알바를 계속 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장학금을 타는 게 더 합리적일 수도?
다름에겐 부모님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다름은 사실 자라면서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부모니의 역할이 가장 컸다. 부모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셨지만, 단 한 번도 다름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지 않았다.
다름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하교 후 엄마에게 달려가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떠들던 풍경이 그려졌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다름의 엄마는 ‘잘했다, 잘했다’고 말해주었다. 자신이 매번 잘한 것만은 아니란 것도, 칭찬받을 만큼 대단한 일을 한 적이 없다는 것도, 엄마의 답이 언제나 같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엄마의 그 말은 너무 따뜻해서 다름은 마음이 뻐근해지고 엄마의 손에 얼굴을 잔뜩 비비고 싶어졌다. 마음 안에 밝은 에너지가 다시 고이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이란 건 눈에 보이는 게 아닌데도 다름은 그 따뜻한 마음 때문에 물질적인 결핍 같은 건 쉽게 잊고 살았다.
한참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던 다름이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규칙적인 발소리를 들은 것은.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가는 길이 갑자기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다름은 가만히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남자로 보이는 사람이 자신을 따라 제 자리에 서있다가 급하게 폰을 만지는 시늉을 했다. 폰이 내뿜는 희뿌연한 빛이 후드 속의 얼굴을 비치는가 싶었지만 그뿐이었다.
다름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처음엔 등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도 빨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멀어졌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을 오해한 건가 싶었다. 다음부턴 조금 빠르게 간다는 이유로 이 골목으로 들어서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늦으면 아빠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 긴장한 마음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고 발을 재게 놀려 집으로 향했다. 골목을 빠져나가 오른쪽으로 꺽어 조금만 오르면 아파트가 보일 터였다.
골목을 빠져 나오는 순간 갑자기 골목 안에 전화벨이 울렸다. 더듬더듬 꺼낸 폰에 찍힌 이름은 다름아닌 나우였다. 바짝 긴장했던 탓에 급작스런 벨소리에 놀라 하마터면 자리에 주저앉을 뻔 했다. 안그래도 속으로 혹시나 스토커가 골목을 돌아 눈앞에 나타나진 않을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탓에 더 그랬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나우와 시덥잖은 대화를 나누어 가면서 긴장은 소리없이 녹아내렸다.
“남다름, 이제 그레타는 그만 둬도 되지 않아?”
주은의 질문은 당연했다. 다름도 그 생각은 안한 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다름은 아직은 1학년이니깐 여유 있을 때 뭐든 해보고 싶다고 둘러댔다. 금전적으로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는 것도 좋았지만, 알바나 과외 자체가 재미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레타에서 몸을 쓰면서 얻게 되는 활기, 효주의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것에서 오는 보람 같은 것들. 거기에 알바를 늘림으로써 다름은 정기후원 하나를 늘리는 것에 부담이 없어졌다. 이전의 알바로 개발도상국의 어린이를 도왔다면 이번 후원으론 북극곰과 멸종동물을 위해 힘을 보탤 수 있었다.
“노력중독이야 뭐야?”
말수가 적은 나우의 그 말이 들릴 듯 안들릴 듯 했지만 다름은 애써 무시하고 화제를 바꿨다.
“근데 너희들 그 소리 들었어? 우리 학교에 잔디 깔아주고 들어왔단 애가 있다더라.”
오늘도 다름의 사물함에 매달려 있던 간식 바구니에서서 젤리와 사탕을 까먹던 주은과 나우의 손이 딱 멈췄다. 잠깐의 정적 후 주은이 말했다. 그게 어느 시대적 유물이냐고, 요즘 세상에도 그런 게 통하는 사회냐고. 하긴, 다름도 조금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냥 학교에 많이 넉넉한 누군가가 다니고 있고 그 사람을 부러워하는 소리일 꺼란 생각이 뒤따랐다.
(세번째 이야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