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올 때면 매번 등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면 후드를 한껏 뒤집어 쓴 남자가 서 있었다. 그 소리에 익숙해진 건 매번 반복되는 일이었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남자가 일정 거리를 유지한채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다름은 그가 바로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스토커인 것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스토커는 밤에 귀가하는 다름의 뒤를 지켰고 골목 끝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느 날 밤 아파트 공용현관에 도착한 다름이 용기를 내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스토커 주제에 그는 짐짓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골목 속으로 쏙 사라졌다. 소심한 인사(人士)인 줄은 알았으나 저 정도일 줄이야! 진심 자신에게 왜 이러는 건지 궁금했다. 한 번은 갑자기 뒤돌아서 그를 향해 달려간 적이 있는데, 그는 허둥지둥 그러나 아주 빠르게 도망가버렸다. 나우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하필 그런 날은 그가 나타나지 않아서 독대에 실패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제는 뒤에서 규칙적으로 들리는 그 발소리가 묘하게 든든하게 느껴졌다. 나를 해칠리 없다는 확신,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 자신의 폰에 쌓여가는 좋은 구절의 문자 메시지들, 거의 매일 걸리다시피하는 사물함의 간식들, 집의 현관 고리에 걸린 소소한 때론 과분한 선물들. 그리고 반복적인 귀가 지킴이까지. 이 정도면 스토커가 아니고 자신을 지켜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아닌가?
이런 마음들이 드는 것이 정상인가 한번씩 의문이 들었다. 의문을 제기할 적마다 주은은 오히려 도움이 되면 됐지 피해를 주는 건 아니지 않냐고 되물었다. 옆에선 나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이런 감정적인 동요가 스톡홀름 신드롬은 아닌지 의심하고 다름은 스토커가 일순간에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에 내려 복도를 지나면 머리맡의 조명, 다른 집의 현관등이 차례로 들어왔다. 집에 들어서기 전 골목 끝을 내다보면 위를 올려다보는 스토커가 보였다. 그건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마치 자신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집에 들어갔다 서른을 세고 밖으로 나와보면 뒤돌아서는 스토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이 조금 쓸쓸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는 오늘도 다름의 뒤를 따랐다. 언젠가 그녀의 뒤가 아닌 옆에 나란히 서서 걸을 수 있을까? 그럴려면 이 미친 짓거리부터 그만둬야 할텐데, 고백할 용기는 없고 포기할 용기도 없었다. 다름은 씩씩한 것 같으면서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슬아슬하게 느끼는 면이 있었다. 자신의 선의가 얼마나 달콤한지 자신의 다정함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그녀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껏 악의로 들어찬 세상에서 살아온 그는 그런 그녀를 누군가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누군가는 자신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오늘도 그녀는 아파트 1층에서 슬그머니 뒤돌아섰다. 그런 일이 종종 있는 일이라서 짐짓 모른척을 하고 가만 서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자그맣게 손을 흔들었다. 순간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그녀에게 보일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잠시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그녀는 따뜻한 조명을 받으며 안전한 집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상했다. 아무리 엘리베이터가 고층에 있다 내려가 그녀를 태워 올라갔다 하더라도 벌써 복도에 그녀의 모습이 나타났어야 했다. 그런데 11층 복도엔 불이 밝혀지지 않고 어둠뿐이었다. 그는 급하게 발을 내디뎌 아파트로 향했다. 발이 사막이라도 걷듯 자꾸 헛디뎌지고, 뻘를 걷듯 아래서 무엇이 잡아채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는 11층에 도착해있었다. 그새 도착해서 길이 엇갈린건가?
불안해진 그가 계단으로 방향을 바꿨다. 위로 올려다봐도 계단에 가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시선은 자꾸만 위로 향했다. 계단을 두 개씩 세 개씩 건너뛰며 위로 올라갔다. 땀이 줄기가 되어 등 뒤로 흐르고 이마에서 흐른 땀은 눈을 따갑게 했다. 층을 오를수록 위쪽에서 들리는 소음이 분명해졌다. 실랑이를 하는 소리였다. 그의 발걸음이 더 빨라지며 계단에 그의 거친 숨소리가 가득찼다.
눈 앞의 풍경이 의외였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얼이 빠진 듯 층의 중간에 주저앉아 있고, 그 옆에서 다름이 사내 하나와 실랑이를 버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내가 여학생을 해꼬지 하려고 했고 이를 발견한 다름이 학생을 돕기 위해 나선 것 같았다. 잇새로 욕설이 튀어 나갔다. 너의 다정함은 이렇게 무방비한 것이었구나. 그가 위험할 수 있는 다름부터 떼어내고자 했다. 다름은 그를 사내와 한 편으로 생각했는지 거칠게 저항하며 닥치는 대로 팔을 휘둘렀다. 그 팔이 그가 뒤집어쓴 후드를 쳐냈고 순식간에 후드가 벗겨졌다.
당황한 그는 얼굴이 보이지 않게 빠르게 뒤돌아 섰다. 그때 다름이 재빠르게 가방을 집어 들어 도망치려는 사내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바닥에 쓰러졌다. 아! 다름이 오늘 가방 안에 노트북을 챙겨왔단 사실이 떠올라 저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보지 않아도 등 뒤에서 자신을 향한 다름의 뜨거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후드를 다시 쓰려는 그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1년전>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공기가 찼다. 입에서 나온 하얀 호흡이 공기 중으로 천천히 흩어졌다. 엄마는 평소 요리를 하다가 없는 재료를 떠올리고 다름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일이 잦았다. 오늘 필요한 건 두부. 엄마는 다름이 다음 달이면 고3이 된다는 사실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하다. 얼른 다녀올 생각에 슬리퍼 속의 발은 맨발이고, 손은 최대한 끌어당긴 맨투맨 티셔츠 소매 아래 있었다.
한 손에 두부 하나를 들고 집으로 가는 길, 차 한 대가 다름 옆을 지나쳤다. 속도가 느린 차의 라이트가 골목을 핥듯이 지나자 우묵한 골목 안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거기 빛이 투과되지 않는 어둠이 있었다. 처음엔 누가 쓰레기 더미라도 내어놓았나 싶었지만 눈이 어둠에 익자 그것은 웅크린 사람이었다.
무서워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자꾸 마음이 쓰였다. 이럴 땐 골목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조심스레 웅크린 사람에게 다가가 괜히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지루할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다름은 아주 조심스레 손가락으로 그 사람을 찔러 보았다. 설마 죽은 건가? 머리 속에서 끔찍한 상상이 부풀고 있을 때 천천히 그의 몸이 펴지며 얼굴이 보였다.
어린 얼굴은 엉망이었다. 피가 흐리고 찢겨진 상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한 건 그의 마음이 찢어지고 거기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보였다. 그럼에도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하게 갈무리된 표정이 더 가슴 아픈 얼굴이기도 했다. 거기에 한쪽 볼은 누구에게 맞기라도 했는지 붉게 변해 있었는데 내일이면 금방 푸르게 멍이 올라올 것이다. 다름은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지? 어떡해?”
어쩔 줄 몰라 동동거리던 다름은 제가 먹으려고 들고 있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그의 손에 꼭 쥐어 주었다. 그리고 종종거리며 사라지는가 싶더니 근처 편의점에서 튜브형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아이스크림을 체온으로 힘껏 녹여 말캉하게 만들어 건넸다.
“이거라도 볼에 대고 있어. 조금 나을 거야.”
그때 다름의 폰이 울렸고 다름을 걱정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조근조근했다. 하릴없이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뗐다. 어둠 속의 야윈 어깨가 자꾸 눈에 밟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름은 근처 파출소에 전화로 도움을 청했다. 오늘 밤 그 아이가 무사하기를 바라면서. 그날 그녀는 골목 안 그 아이 손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들려 있는 것을 끝까지 알지 못했다.
계단엔 어느새 둘만 남았다. 소란이 휩쓸고 간 후라서 그곳의 정적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어떻게 그래요? 그때 그 애가 나인 줄 알면 얼마나 징그럽겠어? 누나는 나 기억도 못하는데, 난 잠깐 만난 것 때문에 이렇게 학교까지 쫓아왔으니까 무섭대도 할 말 없죠.”
나우는 지금껏 둘의 관계가 친구였다는 사실을 잊은 듯 과거의 그 어두운 골목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점점이 떨어진 그의 눈물에 콘크리트 바닥이 회색으로 천천히 물들었다.
치한과의 실랑이에 뛰어든 사람이 처음엔 일행인 줄 알았던 다름은 낯익은 후드티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다음 순간 그가 매번 자신이 집 안까지 들어설 때까지 기다린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자신이 나타나지 않자 그가 달려왔을까? 매번 골목 끝에 선이라도 그어 놓은 것처럼 넘어서지 않았었는데...
그런데 그 스토커가 친구 나우일 줄이야! 그리고 나우가 1여년전 만난 골목의 그 소년이라니!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다름은 나우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으나 덩치로 보나 힘으로 보나 불가능하기에 다름은 입맛만 다셨다.
나우와 다름의 첫 만남은 올해가 아닌 지난해 초였다. 다름은 그때 한동안 골목에서 만났던, 뺨이 빨갛게 부어오른 소년을 걱정했었다. 그렇지만 다른 일들처럼 이후에 까맣게 잊고 있었음도 떠올렸다. 다름은 그때가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고 기억했지만 나우의 그 겨울은 손안에 쥐어진 뜨거운 커피와 뺨에 와닿는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만난 이상한 날이었다. 차가운 손을 뜨거운 물에 담근 것처럼 따가운 것도 것도 같고 간지러운 것도 같은, 한편으론 저릿저릿한 이상한 일이었다고.
“그때 그 앤 아주 어렸는데...”
고작 1년전쯤 일이었지만, 나우가 그때의 소년과는 동일인물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작게 내쉰 나우가 주머니를 뒤적여 지갑을 꺼내더니 학생증을 내밀었다. 이나우 030415-3****** 03년생? 그럼 이제 18살? 학생증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작 18살의 미성년자가 그것도 남들이 말하는 명문대에 입학을?
“이나우, 혹시 너 학교에 잔디 깔았니?”
“뭐에요, 진짜.”
나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는 자퇴 후 검정고시와 수능을 거쳐 대학에 입학했음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온전히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다름은 그가 왜 스토커처럼 굴었는지 조금 이해가 되고 또 스토커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도 됐다. 그리고 1년 전 그때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는 그때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건지 다름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계단에 쪼그려 앉은 나우가 먼 곳을 바라보며 그때의 이야기를 덤덤하게 하기 시작했다. 왜 그때 다름이 건넨 커피 한 잔이 그렇게 따뜻했는지도...
“그러니까 그때 집에서 아버지가...”
조용한 밤의 계단에서 낮은 나우의 목소리가 울리고 옆에 앉은 다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팠던 그의 마음이 상상이 돼서 나우의 손을 잡아주는 것을 잊지 않은 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