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되는게 어때서요.
꽃 피고 새 우는 봄.
이것은 참으로 상투적인 말이다. 도시의 바쁜 삶에는 '시냇물은 졸졸졸졸, 고기들은 왔다 갔다'는, 별 실질적 감흥 없는, 동요 가사에 불과하다. 사실 사시사철 화원에서 구하는 꽃만큼이나 새는 겨울에도 얼마든지 있고, 도시의 소음 속에서는 봄에도 특별히 새소리를 들을 수가 없기도 하다.
새라고 다 사랑을 받는 것도 아니다. 도시의 비둘기는 害鳥해조(!)에 가깝고, 흔한 참새 따위는 아무도 눈길도 주지 않는다. 요즘 개체수로 미루어 볼 때,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말대로라면 매일같이 손님만 치르다 볼일 다 볼 것이다.
하지만 분명 자연의 봄은, 얼었던 개울물도 졸졸졸 괄괄괄하고, 그러니 고기들도 왔다 갔다 하고, 그리고 새가 노래하는 소리로 시작하는 계절이다.
대부분의 새들은 힘든 기후에서 곰처럼 잔뜩 먹고 겨울잠을 자는 것을 택하지 않고 적절한 기후를 찾아 이동하며 산다. 사람들은 새들이 남쪽 나라에 가서 ‘겨울을 난다’고 하지만, 반대로 너무 더운 기후를 피해 북쪽으로 와서 ‘여름을 나는’ 거라고 볼 수도 있다. 겨울에도 추운 곳에서 사는 새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짧든 길든 어느 정도는 이동을 하면서 사는 대개의 새들이 대충 적도 부근에서 살지 않고 굳이 애써 힘들게 다시 멀리 북쪽으로 오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게 봄이면 새로 도착한, 높은 톤으로 지저귀는 흰 왕관 참새와, 어쩐 일인지 철학자의 이름을 달고 있는 올리브 빛깔의 흄 솔새, 그리고 종달새들, 모두 종족보존 빛 번성이라는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봄이면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 짝짓기 노래를 시작한다.
겨우내, 사시사철 뭔가 항상 의견이 많은 갈까마귀들은 말할 것도 없고, 눈꽃 핀 나무에 조롱조롱 열려 얼음조각 부서지는 소리로 잘그랑잘그랑 울어대던 검은 눈 정코와, 서로 응원이라도 하듯 서로 나무 건너편에서 치카치카 디디디 주고받던 검은 모자 치카디의 노래가 차가운 공기 속으로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었다면, 봄이 오는 대로 제일 먼저 나무 중에서도 가장 큰 나무, 그중에서도 간당간당하게 가장 높은 나뭇가지를 골라 앉아 찌카 찌 카롱 찌카 찌 까롱 롱 하루 종일 울어대는 여우 참새는 그 작은 몸에서 어찌 그런 큰 소리가 나는지,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심원을 허공에서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것이다.
새 공포증까지 가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새소리'라는 것 또한, 그러나, 상투어이다.
내가 그걸 깨달은 것은, 코로나로 인해 하필 오래 준비한 몇 달간의 세계 여행도 취소되고, 아이는 집에 오지 못하고, 이런저런 행사도 다 취소되고, 아무튼 도대체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갇힌 채 봄이 다 지나가고 있던 2020년 봄 끝자락에서였다. 어느 날 아침 창을 밀고 들어오는 새소리가 문득 귀찮다고 느껴지던 날.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로 텅 빈 채, 그리고 동시에, 쌓여가는 그리운 것들로 무겁게 흘러가는 수은 같은 시간 속에서 막막히 백신만 기다리면서 계절이 자꾸 바뀌는 동안, 지인의 가족에서 코로나로 사망한 케이스가 생기고, 지인 중에서 감염되고 장기적으로 후유증을 겪는 사례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두려움은 커졌고, 마치, 내 사랑이 끝났는데 왜 해는 여전히 빛나고, 바다는 여전히 해안으로 밀려오냐고 짜증을 내고 있는 스키터 데이비스의 노래 ‘세상의 끝’의 가사처럼, 그저 무심한 자연에 나는 공연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람에게 사람이 가장 위험해져 버린 세상에 불만만 가득해진 나와, 그런 내가 더 못마땅한 내가 만나니 외려 SNS로 가상현실처럼 이어가는 인간관계도 다 덧없어졌고, 그래서 구독자 4천에 가까와지던 SNS 앱도 지우고 가까이 직접 손 내밀어 닿을 수 있는 것들만 남기고 나는 깊이깊이 침잠하였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나는 여우를 만났고, 다람쥐와 무스의 눈을 마주 볼 수 있게 되었고, 생쥐와 벌레들의 생명을 받아들였으며, 갖가지 새가 생을 의지하는 나무와 풀과 꽃의 결코 정체되지 않은 삶과 성장의 순환과정을 가까이 지켜보게 되었고, 그렇게 다시 우리 사는 세상을 새로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새가 왜, 어떻게 길을 찾아 번번이 그렇게 이동하는지는 모두 학설일 뿐이지 사실 아무도 확실한 鳥心조심(!)은 모른다. 그저 그들은 때가 되면, 왜인지도, 정확히 어디가 목적지 인지도 알리가 없지만 몸이 원하는 방향으로 길을 떠난다. 철새의 이동은 상당히 위험하고 힘든 일이어서, 검은 기둥 솔새 는 출발 전 몸무게의 무려 두배를 불려 86시간의 비행을 준비한다고 하고, 이동하다가 유리창에 부딪쳐 죽는 새가 미국에서만 해마다 10억 마리라고 한다. 호주의 새 이무는 날 수 있는데도 왠지 상당 구간을 걸어서 가고, 펭귄은 수영을 해서 가지만, 아무튼 그들이 몸의 소리를 들으면서 움직여 생존한다는 것은 다 같다.
아무리 겨울이 길다고 해도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오는 것을 알기에 봄을 기다리지는 않지만 올해 나는 봄새는 기다렸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찾아온 이 봄의, 그리고 다시 찾아온 봄새들의 첫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던 날부터 나는 아직 아침 공기가 찬 봄 어귀부터 아침마다 제일 먼저 창을 열어 그들의 노랫소리를 들였다.
우리 가족 모두 백신을 맞았다고는 해도 전 세계 상황을 감안해서 아직 달라지는 것은 여전히 별로 없지만, 사실 ‘못하는’ 것들도, 하려고 했던, 하고 싶은, 나의 얄팍한 욕심이 아니라면 엄밀히 말해 상실이 아니었음을 그동안 하루를 평생처럼 살아가는 이 부지런한 생명들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지난 한 해, 새소리 조차 듣기 싫어서 그렇게 세상을 모두 닫았던 나지만, 그러나, 그 두려움에 가려서 잃은 것만 보고 가진 것은 바라보지 못하는 한심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 비로소 다시 그 안에서 잃었던 ‘나’를 찾아낸 것 또한 다시 동물과 나무와 풀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봄에서 일어난 일인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뭔가를 깨달으면 우리는, 마치 내가 어디론가 사라지기라도 했었던 것처럼 그런 나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처음으로 찾아내 깃발을 꽂고 내 이름을 붙이기라도 한 양. 찾은 것에 내 이름을 붙이는 일이 ‘발견’하는 일이라면 적절하기도 하다.
나는 나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니까, 내 삶의 내 만족은 다른 어디서 오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담기는 모양이 달라진다.
사랑 결핍인 사람 중에서도 그래서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그래서 모든 사랑을 감사하게 받아 많이 나눌 줄 아는 사람도 있다. 반면, 일껏 사랑을 담뿍 받고 자라 모든 이에게 넉넉히 사랑이 넘치는 사람도, 받은 걸 고마워할 줄도 몰라 나눌 줄 모르거나 그걸 자기 이득을 위해 이용할 생각이나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세상의 책을 다 읽고 ‘가고’(!)싶은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팟캐나 오디오북을 들으며 걷다가도, 나는 한 번씩 이어폰을 끄고 가만히 멈추어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안타깝게도 숲 한가운데 서서도 비행기나 글라이더 소리, 심지어 종종 부근의 공군부대에서 뜨는 전투기 소리가 자연의 소리보다 더 크기도 하지만, 기다리면 틀림없이 뭐가 예쁜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어느 생명이 어디선가 거기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운다’는 말의 어원은 웃다와 같아서, 눈물을 흘리며 운다기보다는 그저 ‘소리를 낸다’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도 없는 숲에서도 나무가 쓰러져도 분명 소리가 나듯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도 소리를 내면 소리가 난다. 누군가 지나가다 들어주기도 하겠지만, 혹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소정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했어도 한 철 신나게 울면 그걸로 다 한 것이지 ‘잃은’ 것은 없다. 그걸 이제는 안다.
젖은 잔디에 오렌지색 가슴의 롸빈이 파놓은 흙 구멍들이 소복소복이 말라가고, 눈에 띄는 일찍 일어난 새들은 모두 살진 벌레를 부리에 단단히 물고 있는 하루 출발선. 모두들 아침 잘 챙겨 먹었구나.
안녕?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살아있는 것들, 오늘도 모두들, 부디 안녕, 안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