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비나무처럼

내가 편지를 쓰는 이유

by 숨은 연못

친애하는 H에게


아침 커피를 내리면서 무심히 팟캐를 듣다가, 코로나에 걸려서 병원에 들어가면서, 그저 혹시나 해서 쓴 게 결국 유서가 된 누군가의 편지를 들었습니다.

별로 내용이 인상적일 것도 없고, 그냥 담담한 사랑과 감사와 되돌아 봄의 말들이었던 게, 아마도 그저 ‘이 참에 해두자’의 말 정도였을 것인 게 더 쓸쓸했던 편지. 아마도 우리가 마음먹고 앉아서 유서를 쓴다면 괜스레 비장해져서는 당부의 말이랍시고 정작 ‘하고 싶은 말’보다는 ‘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멋대가리 없는 말을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요. 실제 ‘유서’라는 건, 추리소설에서 주로 재산상속 싸움 이야기로나 나오듯이.


그렇게 생각하면, 무능하고 가난하게 살다가 일찍 돌아가신 (그래서 나는 얼굴도 못 뵌) 시할아버지가 시할머니에게 남기셨다는, ‘잘 살으래이’ 한마디보다 더 덕담도 없을 것도 같고,

하지만 그게,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딸 하나와, 낳아놓고 보니 또 딸이라서 스스로 자진하라고(?!) 윗목에 밀어두었는데도 사흘이 지나도 살아있어 그냥 키웠다가 결국 임종까지 할머니를 도맡아 돌보게 된 막내 고모님 포함, 맏아들 하나 밑으로 딸 여섯을 아내에게 무책임하게 남겨놓고 가는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턱없이 대책 없기도 하고.


오스카 와일드는 ‘아 이 방 벽지 진짜 마음에 안 드네’가 마지막 말이었고,

마리 앙트와네트의 마지막 말은, 단두대에 올라가다가 자칫 발을 밟은 사람에게 ‘미안, 일부러 그런 거 아닌데’였다고 하니 (믿거나 말거나),

마지막 말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다면 의미가 있고 없다면 없는 것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 모든 말이 모두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 사는 게 뭐 또 다 그렇고.

그렇다고, 헛되고 헛되도다, 로 이어지기 전에, 그래도, 왜 이렇게 내가 편지를 쓰고 있느냐 하면, 결국, 한 순간 후도 모르는 살이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나도 마지막일지 모르고 쥐어 준 말이 따뜻한 것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라는 이야기인가 보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말은 모두, 동시에, 그렇게 유언(남길 유 遺 말씀 언 言)이라 할 수도 있으니까요.

마음에 ‘남기는’ 말이니까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내가 과학을 좋아하게 된 데 일조를 하신 과학선생님이 ( 내가 님, 자를 붙이는 얼마 안 되는 선생’님’ 중 하나) 어느 날 들어오셔서는 물으셨지요.


-지구가 우주에서 얼마나 작은지 아냐


그리고 선생님은, 아주 잘 닦아 놓은 칠판 한가운데 분필로 애써 어깨와 팔에 힘을 들여 최대한 작은 점을 찍는 것으로 보였고, 아이들은 저마다, 저깄다! 아 나는 보인다! 하며 나댔고(!), 나도 아직(!)은 제법 좋은 1.5/1.2의 시력으로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한 그 작은 점을 찾아 열심히, 작은 키에 짧은 목을 뽑으며, 그래도 작지는 않은 눈을 더 크게 떴고,

선생님은 연신,


-보여? 어디? 어디, 여기?


하셨고,


그리고 잠시 후 선생님은 장난스레 씩 웃으시며 말씀하시길,


-보일 리가 있냐, 안 찍었는데


그날, 그렇게, 우주가 칠판 사이즈라면 지구는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우리가 작디작은 존재라는 게, 그래서 그 어린 나이에도 우리가 안달복달하는 게(그래 봤자 다 해 놓고 집에 두고 온 숙제쯤이었겠지만) 설핏 하찮게 느껴지던 그 기억이 가끔 떠 오릅니다.

그리고 다시 훗날, 그런 우주의 미물 인간은, 아무리 과학과 의학과 기술이 발달했다고 ‘나대도’, 인간보다도 더 작은 ‘미물’ 바이러스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그게 무엇이든, 사람들이 번번이 뭔가를 ‘배웠다’는 걸 보면 그렇게 배운 만큼 정말 조금씩 나아졌으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일 것 같지도 않으니,

우리는 모두,

수능 끝나자마자 학습서 내다 버리는 고3처럼 먼저 배웠던 걸 죄다 잊고 살든가,

깨달은 대로 지키지 못했든가, 지키지 않았든가,

애초에 깨달은 것이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었던가,

깨달았다는 말이 거짓이었던가,

이런 소용없는 의문을 꿍얼꿍얼 늘어놓노라면 언제나처럼

‘그 모두겠지’

라고 명쾌히(!) 답하는 에코의 말대로던가.

(이렇게 될까 저렇게 될까, 하고 물으면 늘 ‘이렇게 아니면 저렇게 되겠지’하고 역시 명쾌히(!!) 선언함 - 학교 다닐 때 사지선다 문제에서 4번 : 모두, 아니면, 모두 해당 안됨, 을 골랐을)


하기야, 무슨 무슨 지역 축제랍시고, 멀쩡하게 잘 놀 물고기를 잡아다 베이비 풀에 풀어놓고 뛰어들어 싸우면서 맨손으로 잡는 그로테스크한 ‘체험’을 하러 몰려드는 사람들이 그 경험으로 무엇을 ‘배울’ 지를 생각해보면, 아무리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든 결국은 무엇이 얼마나 내 안에 남는지가 중요한 거겠지만요.


느닷없이 이게 다 무슨 얘기냐 하면,

그래도 10년 전부터는 대략 평균 2년마다 한 번씩은 한국에 갔는데, 올해는 계획했던 여행은커녕 한국에 가 옛날 짜장 한 그릇도 못 먹는다고 투덜거리다 보니, 그 전에는 형편이 안되어 남동생 결혼식에도 못 가고 5년에 한 번씩 겨우 들어간 적도 있었는데 좀 살만해졌다고(?) 그새 초심을 잃었구나, 사람 마음 얄팍하기가 어째 갑작스러운 수요 증가로 턱없이 부족해졌다는 둥근 반도체판 같구나 싶어 짐짓 혀가 메롱 나와서 말이에요.

어차피 어른이 된다는 건 대단히 현명해지기는 커녕, 애들한테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던 걸 터놓고 마음껏 할 수 있는 것뿐이라지만(!). 인생에 있어서도 나는 별로 좋은 학생이 못되고, 늘, 왜요, 그건 왜죠, 도대체 왜 그래야 하죠, 하고 질문을 싫어하는 실력 없는 선생에게 손을 자꾸 들고 있는 삐딱선 기적소리 나는 학생인 것일까요?




뒷마당의 때로는 좋이 5층 아파트 높이는 될 만큼 큰 가문비나무들은, 사철나무라고는 해도 겨울에는 어두운 녹색으로 종종 눈을 온통 덮어쓰고 조각처럼 서 있어. 그러면 우리는 한껏 웅크리고 우리 겨울을 나기 바빠서 그 녀석들이 나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요.

하지만 봄이 오면 그 크고 늙은 나무들에도 어김없이 새싹이 난답니다.


꼭 손가락만 한 굵기의, 그리고 꼭 손가락만 한 길이의 새순들이 연초록 가시들을 달고 가지 끝마다 뻗어 나오는 모습이 마치 녹색 치맛자락에 연두색 실로 아프간 레이스 뜨기를 해 단 것 같이 곱고, 그러면 어쩐지 나무는 어느새 전체적으로 둥실둥실 바람에 흔들리며 날개를 단 듯 한층 가벼워 보이기도 하는 거지요.

올려다보면 목이 뻐근하도록 너무 커서 키는 해마다 얼마나 크는지 가늠이 안 가도 그렇게 매년 내 검지 손가락만큼씩 자란 나무들은 정원사들이 가지치기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아마도 내가 여기 산 10년 동안만에도 산책로 건너로 서로 팔을 맏닿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이번 질병은 혹 견뎌냈는지 몰라도, 언젠가, 인간이 자기들이 쳐놓은 덫을 더 이상 벗어나지 못하는 날이 오면, 한껏 자라나 인간이 만든 길도 지우고, 인간이 만든 쓰레기도 모두 눈처럼 덮어버리고, 그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돌아가겠지요.


오션 브엉의 책 ‘우리는 지상에 짧은 시간 눈부시게 아름답다’에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는 말은, 무엇이 지속되지 않을까 두렵다는 말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지속될지라도 내가 없어질까 봐, 내가 변할까 봐 걱정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지요. 하지만, 영원한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없을지 몰라도, 변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항상 썩지도 않은 것들이 문제지 조금씩 달라지고 ‘성장하는’ 모든 것은 이렇게 놀랍고 아름다운 것이니까요.


그렇게 우리 모두 조금씩만, 아주 조금씩만 배우고 달라지면서 살 수만 있으면, 그러면 우리도 나이 들면서 어깨는 아프고, 뼈마디는 굳어져도 그래도 ‘영원히’ 풋풋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가문비나무처럼.


2021년 여름 초입에

당신이 몹시 그리운 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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