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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은 연못 Oct 02. 2023

알로하 하와이, 알로하

18) 에필로그 

꿈같이 지나가 버린 하와이에서의 석 달. 

너무 황홀해서 꿈같다기보다는, 외려 그저 부지런히 먹고 산 기분이라서, 비행기 타고 와서 다음 날 일어나니 집에서 깨어났고, 어제처럼 다시 일상을 시작해야 했기에 꿈같았던 석 달. 


언제든 여행으로도 다시 가겠지만, 혹 또 이렇게 하와이 아니라 어디든 장기로 갈 일이 있으면 아마 다음에는 이번보다는 덜 버벅거릴 것이라는 생각에서 팁을 정리해 나누는 마음의 기록이 끝났다.  


애초에 미국에 올 때도 에코 유학이 끝나면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반평생을 떠 돌며 살고 있지만, 사실 나는 심지어 당일치기 캠핑도 좋아하지 않는, 집이 제일 좋은 근본천생 집순이다. 

이제 자식들 떠나보내며 빈 둥지 신드롬을 겪는 또래들이, 너는 맨날 혼자서 뭐 하고 놀아? 하고 자주 물어들 오는데 (내 아이가 대학을 향해 집을 떠난 지가 거의 10년 전이다) 나는 '항상 모험이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시나요'라는 물음에 단호히 '아니요'를 고르고, 혼자서도 잘 놀아서 지루하다는 것을 모르고, 뭔가 재미있는 일 없을까,라는 생각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다. 

미국에 안 가본 주가 거의 없고, 일 년에 한두 번은 다른 주로 놀러 다니기는 하는데, 뭐랄까, 나에게 있어 '놀러 간다'는 것의 정의는 :

"오래 계획하고, 낑낑거리고 짐 싸고, 들고 가 풀어놓고 며칠 있다가 다시 끙끙거리며 싸가지고 돌아오면서 꼭 뭐 하나 잃어버리는 것"

이라는 분위기랄까. 순전히 내 맘 편하자는 이기적인 목적에서 남에게 맞춰주는 게 좋은 편이라서 어디 가도 누구와도 잘 어울려 지내기는 하는데, 그래서 더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편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혼자 가지?

혼자 집에서 노는 게 제일 좋다니까요. 


그러니, 수년 전 에코의 사바티칼도 유럽이나 일본을 알아보던 중, 정말 갑자기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버이 살아 실제 섬기기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달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싶어 한국으로 정해 10개월간 한국 부모님 집에 있었으니 이렇게 낯선 곳에서 오래 지낸 것은 처음이다. 그래서 비단 하와이뿐 아니라도 어디든 집을 떠나 호텔이 아닌 곳에서 오래 '살림'을 하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배우며 반성하는 기회기도 했다. 


코로나가 처음 창궐하기 시작하던 2019년에 계획했던 러시아 두세 달 살이를 먼저 했으면 좀 나았을까? 

아니, 이번에 이렇게 장기 스테이를 해보았으니 언제든 전쟁이 끝나서 다시 러시아 문이 열리고 계획대로 러시아에 가게 되면 그때는 더 잘할 수 있을까, 

갸웃거려 본다.

러시아에서 에코를 초청한 대학에서도 전쟁 나기 전까지는 코로나 끝나는 데로 다시 오라고 했다는데, 어서 전쟁이 끝나 러시아에 가서 지내는 꿈을 꾸어본다.

여전히 집이 제일 좋지만 순전히 2019년부터 러시아 간다고 러시아어 공부한 게 아까와서. 데헷

그리고 정말이지 전쟁도 끝났으면 좋겠어서.




내가 사진 워낙 사진 찍는 걸 싫어하기는 하지만, 에코는 내 사진을 몰래(?) 찍을 때 좀 예쁠 때 찍어 줄 것이지(이제는 나이 들어 실수로도 그럴 때가 없다는 게 함정) 항상 여행길에 지쳐 깜빡 잠이 들었을 때라든가, 없는 조개껍질을 찾느라고 자벌레처럼 한껏 등을 구부리고 있다든가 하는 모습을 찍는 식이다. 

찍어서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혼자 가지고 있다가 들키면 마지못해 보여주면서 ’지우면 안 돼!‘하고 약속을 받는다. 레스토랑에서도 음식은 놔두고 메뉴판을 찍고 자주 타고 다니던 버스와 늘 말라사다를 사던 Duke의 빵 진열대를 찍는다. 기억에 담아두려고 그런다나.

그러고 보면 어차피 아무도 안 볼 나의 사진들은 어차피 '에코가 아는' 나의 모습이다.


그런 사진들을 (야단치면서) 보다가 문득 내 사진 속에 얼결에 같이 들어간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미국 오기 전 우리 집에 놓여있던 사진 하나에는 우리 뒷 배경에 접은 우산을 들고 걸어가는 낯선 아저씨 옆모습까지 덩달아 확대되어 있었다. 사진은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아직도 눈에 선한, 누군지도 모르는 그 아저씨의 안녕이 한 번씩 궁금해지곤 할 정도.(우리 20대에 50은 되어 보이셨는데 아저씨 살아는 계신가)


나도 하와이에 머무르는 동안 다녀간 많은 사람들이 찍는 사진들에 배경으로 많이도 들어갔을 것이다. 간간히 눈에 들어오던 유투버나 인스타스타들 비디오의 고즈넉한 척하는 일몰 분위기를 망치는 조개줍는 행인과 에코의 농담에 낄낄거리는 잡음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저 ‘배경’으로 남는다는 것. 

가급적 눈에 많이 띄고 관심 많이 받는 게 곧 성공인 것 같은 세상에서, 이따금은 어디에든 누구에게든 정말 무의미한 백색 소음이 되어주는 것도 무해한 삶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병으로 몸살을 알고 있는 하와이에 애초에 족적을 많이 남기지 않는 게 목적이었던 석 달 살이. 


알로하 하와이, 알로하, 부디 알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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