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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은 연못 Sep 28. 2023

서핑 하와이

14) 서핑의 미학

surfer들은 매일매일, 파도가 높은 조금 먼바다에 나가 파도를 기다린다. 

바람이 잦은 날은 기다리는 시간이 실제 서핑을 하는 시간보다 훨씬 길다. 그래도 끈기 있게 기다리다 '좋은 놈'이 오면 일제히 일어나 서핑을 시작한다.

나름대로 안전을 위해 서로 양보하는 상도(?)가 있다긴 하지만, 서핑하기 좋은 파도도 드물고 보니 적당한 간격을 두고 하는지 파도 한 번에 하나씩은 아무래도 무리다. 


서핑 문외한인 나는 서핑이 파도 '위'를 타는 게 아니라 파도고랑을 타고 내려오는 동작의 반복이라는 것을 이번에야 알았다. 그리고 서핑대회에는 그저 기술만 보는 것이 아니라, 둘이 묘기를 보이거나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종목도 있다는 것도.


그러고 보니 처음 4월에 한국을 향해 떠난 이후로, 그리고 하와이에 도착해서도 여독을 한 번도 제대로 푼 적이 없었다. 시차 때문에 내 몸의 시계가 엉망이 되어버리는 것도 힘들고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것도 물론 힘들지만, 딱히 바쁘지도 않고 몸 편한 곳에 있어도 익숙지 않은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 자체도 힘이 드는 일이라는 걸 다시 절감했다.

그래서 여독旅毒이란 말의 적확성이 좋다.


나는 그래서 해 질 무렵에도 차지 않은 친절한 하와이의 바다에 들어가 오래오래 파도를 타며 '독'을 우려내곤 했다. 그래서 집안은 언제나 모래가 서걱서걱했다. 쓸어도 닦아도 끊임없이 어디선가에서 모래가 솔솔 쏟아졌다.

해가 식은 저녁에 인파를 따라 거리를 천천히 거닐며 꼭 30년 전 처음 하와이에 왔었던 나를 떠 올리면, 그게 과거의 나라는 생각보다는 그 시간이라는 곳에 그 나는 여전히 그렇게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 몸을 끌고 다니는 나에게 그 아이는 생경하다.


시간은 그렇게 모래처럼 알지 못하는 구석에 쌓이고 끼여서 지고 다니는 것이 이렇게 무거운 걸까.


파도가 잔잔한 날에는 손목에 연결한 board를 믿고 바다 위에 가만히 누워 보곤 했다. 

철썩철썩 물결이 귀에도 들락거리고 나를 파도 위로 넘실넘실 그대로 띄워 넘겨준다. 어려서 중이염이 잦아서 수영 배우는 시기를 놓쳤지만 물이 무서웠던 건 아니라서 친절한 물 위에 힘을 빼고 눕기만 하면 되는 걸 나중에라도 배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누워서 올려다본 파아란 하늘은, 실제, 그리고 사진으로 찍은 하늘과 달리 노안으로 인한 거뭇거뭇 먼지 같은 게 떠 다닌다. 이제 나는 죽는 날까지 잡티 없는 하늘은 볼 수 없겠지. 하지만 그 하늘은 이제 아무도 모르는 ‘내 하늘’이다.


Annie Ernaux도 The Years에서 나이 먹을수록 과거와 미래의 시간 감각이 뒤틀리는 느낌과, 내 과거의 ’그‘(그때의 나)와 지금 이 순간의 ‘나’의 괴리감을  느꼈다는 것을 읽고 위안받는다.


몸에 남은 역사.

남은 건 그게 다여도 어쩌면 그대로 좋은. 


이 나이에 나는 이제 서핑은커녕 파도 위 보드 위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코어근육조차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쯤 그들과 함께 마치맞은 파도를 한번 기다려보고 싶다.


넘실넘실, 시간에 몸을 맡기고 옳은 때를 고르는 걸 배워보고 싶다.









#한달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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